연도

내용

문헌

비고

세종 19년
(1437년 4월 15일)

흠경각루 외형 모습

세종실록

경복궁

세종 20년
(1438년 1월 7일)

흠경각루 완성. <흠경각기(欽敬閣記)>

세종실록
국조보감

7, 신숙주 

성종 21년
(1490년 윤9월 6일)

흠경각루 가산의 잡상과 내부 자격장치가 오랜기간 훼손되어 방치됨

성종실록

 

성종 24년
(1493년 5월 10일)

흠경각루 보수 완료. 전습을 위한 춘분, 하지, 추분에 10일 동안만 운영. 해자(海子)와 주전(籌箭)에 대한 역할 소개

성종실록

 

중종 4년
(1509년 11월 8일)

흠경각루 수리 및 개작에 대한 청취한 후, 현재 흠경각루 개수를 통해 세종조를 계승

중종실록

 

중종 12년
(1517년 11월 25일)

흠경각 교정 진행중

중종실록

 

중종 38년
(1543년 11월 2일)

흠경각루 가산의 기기(欹器)에 대해 논함

중종실록

국조보감

20, 신숙주 

명종 5년
(1550년 6월)

관상감 제조 상진(商震)과 김익수(金益壽)에게 빈풍칠월의 형상과 잘 맞도록 잡상들의 개수를 지시함

국조보감

22, 신숙주 

명종 5년
(1550년 8월 3일)

흠경각루 파손에 대비

명종실록

명종 5년
(1550년 11월 6일)

기기(欹器)를 수리함. 임금 곁의 좌우에도 설치

명종실록

 

명종 8년
(1553년 9월 14일)

경복궁 화재. 흠경각 불탐

명종실록

국조보감

22, 신숙주 

명종 8년
(1553년 12월 26일)

흠경각의 초양(草樣, 기초 토대)을 이룸

명종실록

 

명종 9년
(1554년 8월 2일)

흠경각 중창(重創, 건립)

명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연려실기술

2, 이행 

3, 이긍익

명종 9년
(1554년 8월 19일)

흠경각 중수에 대한 공궤(供饋)

명종실록

 

광해군 5년
(1613년 8월 1일)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흠경각의 공사 중지 요청이 있었으나 계속 진행함.

광해군 일기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

서린문

광해군 5년
(1613년 8월 30일)

흠경각 건설도감이 건설 부지에 대해 아룀

광해군 일기

 

광해군 6년
(1614년 7월 9일)

흠경각 내부 장치 수리에 대한 논의. 가산(假山)의 산 모형, 초목의 형상, 사신(司辰) 등의 인물상

광해군 일기

 

광해군 6년
(1614년 7월 18일)

흠경각 서루(西樓)의 수리를 조속히 끝내도록 명함

광해군 일기

 

광해군 6년
(1614년 9월 14일)

흠경각 건설 도감이 천지호(天池壺)의 완성을 아룀

광해군 일기

 

광해군 8년
(1616년 1월 16일)

흠경각 교정. 박자흥(朴自興)을 흠경각 교정청의 부제조로 차임

광해군 일기

 

광해군 8년
(1616년 8월 12일)

흠경각의 교정이 거의 완료됨

광해군 일기

 

광해군 8년
(1616년 8월 20일)

흠경각 교정청이 야루(夜漏)의 교정에 대해 보고함. 탁수의 찌꺼기로 인해 시간이 잘 맞지 않음

광해군 일기

 

광해군 8년
(1616년 8월 29일)

흠경각 교정청이 야루의 교정 상황을 보고함.

광해군 일기

 

광해군 9년
(1617년 1월 18일)

흠경각을 춘분 이후부터 관상감 제조 이하가 상세히 교정할 것을 지시

광해군 일기

 

효종 6년
(1655년 11월 17일)

흠경각 터에 전각을 짓고자 함

효종실록
국조보감

 

권28, 신숙주

효종 6년
(1655년 11월 23일)

흠경각을 철거하고 그 목재와 기와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논함

효종실록

 

효종 6년
(1655년 12월 4일)

김육이 흠경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대비전을 세우는 것을 불가함을 논함

효종실록
임하필기
잠곡유고

3, 이유원

6, 김육 

효종 6년
(1655년)

대비를 봉양하기 위해 흠경각 옛 터에 만수전과 춘휘전을 세움

국조보감
궁궐지
임하필기
신증동국여지승람

 38, 신숙주

창덕궁지

13, 이유원

2, 이행

영조 46년
(1770년)

경복궁에서 발견한 석각천문도(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관하기 위해 흠경각 재건

증보문헌비고
승정원일기
임하필기
연려실기술

상위고 권3

3, 이유원

별집 권7, 이긍익

정조 18년
(1794년 3월 24일)

흠경각 보수를 명함. 흠경각루는 부재

정조실록

 

고종 13년
(1876년 11월 4일)

경복궁 화재. 흠경각 불탐

고종실록

경복궁

 


 

흠경각루 외형 소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77권, 19년(1437 정사 / 명 정통(正統) 2년) 4월 15일(갑술)
주야 측후기인 일성정시의가 이룩되다

…(생략)…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작은 집을 짓고 이름을 ‘흠경각(欽敬閣)’이라 하고, 종이를 붙여서 산 모양을 만들어 높이는 일곱 자 가량인데, 집 가운데 놓고 안에는 기륜(機輪)을 만들어서 옥루수(玉漏水)를 이용하여 치게 하였다. 오색 구름은 해를 둘러 나들고, 옥녀(玉女)는 때를 따라 방울을 흔들며, 사신 무사(司辰武士)는 스스로 서로 돌아보고, 4신과 12신은 돌고 향하고 일어나고 엎드린다. 산 사면에는 빈풍(豳風) 사시(四時)의 경(景)을 진열하여 백성의 생활이 어려움을 생각하게 하였다.기기(器)를 놓고 누수의 남은 물을 받아서 천도의 영허(盈虛)하는 이치를 살피게 하였다. …(생략)…


흠경각루 완성. 「흠경각기(欽敬閣記)」<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80권, 20년(1438 무오 / 명 정통(正統) 3년) 1월 7일(임진)
흠경각이 완성되어 김돈에게 기문을 짓게 하다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건설한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이 마련한 것이며, 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임금이 우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니, 이에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제왕이 정사를 하고 사업을 이루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역수(曆數)를 밝혀서 세상에 절후를 알려 줘야 하는 것이니, 이 절후를 알려 주는 요결(要訣)은 천기를 보고 기후를 살피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기형(璣衡)과 의표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상고하고 징험하는 방법이 지극히 정밀하여 한 기구 한 형상만으로는 능히 바르게 할 수 없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이 일을 맡은 자에게 명하여 모든 의기(儀器)를 제정하게 하였는데, 대소 간의(大小間儀)·혼의(渾儀)·혼상(渾象)·앙부일구(仰釜日晷)·일성정시(日星定時)·규표(圭表)·금루(禁漏) 같은 기구가 모두 지극히 정교하여 전일 제도보다 훨씬 뛰어나 오직 제도가 정밀하지 못하고, 또 모든 기구를 후원(後苑)에다 설치하였으므로 시간마다 점검하기가 어려울까 염려하여, 이에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다 한 간 집을 세웠도다.


풀[糊]먹인 종이로 일곱 자 높이의 산을 만들어 집 복판에 설치하고, 그 산 안에다 옥루기(玉漏機) 바퀴를 설치하여 물로써 쳐올리도록 하였다. 금으로 해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는 탄자만 하고, 오색 구름이 둘러서 산허리 위를 지나도록 되었는데, 하루에 한 번씩 돌아서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고 밤에는 산 속에 들어가며, 비스듬한 형세가 천행에 준하였고, 극의 멀고 가까운 거리와 돋고 지는 분수가 각각 절기를 따라서 하늘의 해와 더불어 합치하도록 되어 있다. 해 밑에는 옥으로 만든 여자 인형 넷이 손에 금 목탁을 잡고 구름을 타고,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 서 있어 인·묘·진시 초정(初正)에는 동쪽에 섰는 여자 인형이 매양 목탁을 치며, 사·오·미시 초정에는 남쪽에 섰는 여자 인형이 목탁을 치고, 서쪽과 북쪽에도 모두 이렇게 한다. 밑에는 네 가지 귀형(鬼形)을 만들어서 각각 그 곁에 세웠는데 모두 산으로 향하여 섰으며, 인시가 되면 청룡신(靑龍神)이 북쪽으로 향하고, 묘시에는 동쪽으로 향하며, 진시에는 남쪽으로 향하고, 사시에는 돌아서 다시 서쪽으로 향하는 동시에 주작신(朱雀神)이 다시 동쪽으로 향하는데, 차례로 방위를 향하는 것은 청룡이 하는 것과 같으며, 딴 것도 모두 이와 같다.


산 남쪽 기슭에는 높은 축대(築臺)가 있어, 시간을 맡은 인형 하나가 붉은 비단옷 차림으로 산을 등지고 섰으며, 인형 무사 셋은 모두 갑옷 차림인데 하나는 종과 방망이를 잡고서 서쪽을 향해서 동쪽에 섰고, 하나는 북[鼓]과 부채를 잡고 동쪽을 향해 서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가까운 곳에 섰고, 하나는 징[鉦]과 채쭉을 잡고 동쪽을 향해서 서쪽에서 약간 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서 있어서, 매양 시간이 되면 시간을 맡은 인형이 종 치는 인형을 돌아보고, 종 치는 인형도 또한 시간을 맡은 인형을 돌아보면서 종을 치게 되며, 매경(每更)마다 북과 부채를 잡은 인형이 북을 치고, 매점마다 징과 채를 잡은 인형은 징을 치는데, 서로 돌아보는 것은 종 치는 인형과 같으며, 경·점마다 북 치고 징 치는 수효는 모두 보통 시행하는 법과 같다.


또 산 밑 평지에는 열두 방위를 맡은 신들이 각각 제자리에 엎드려 있고, 열도 방위 신 뒤에는 각각 구멍이 있어 상시에는 닫혀 있다가 자시(子時)가 되면 쥐 모양으로 만든 신 뒤에 구멍이 저절로 열리면서 인형 옥녀(玉女)가 자시패를 가지고 나오며, 쥐 모양으로 만든 신은 그 앞에 일어선다. 자시가 다 가면 옥녀는 되돌아서 구멍에 들어가는 동시에 구멍이 저절로 닫혀지고 쥐 모양의 신도 제 위치에 도로 엎드린다. 축시가 되면 소 모양으로 만든 신 뒤의 구멍이 저절로 열리면서 옥녀가 또한 나오며, 소 모양의 신도 일어나게 되는데, 열두 시간이 모두 이렇게 되어 있다. 오방위(午方位) 앞에는 또 축대가 있고 축대 위에는 기울어진 그릇을 놓았고 그릇 북쪽에는 인형 관원이 있어, 금병(金甁)을 가지고 물을 따르는 형상인데 누수 남은 물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흐르며, 그릇이 비면 기울고 반쯤 차면 반듯해지며, 가득 차면 엎어져서 모두 옛말과 같이 되어 있다. 또 산 동쪽에는 봄 3개월 경치를 만들었고, 남쪽에는 여름 경치를 꾸몄으며, 가을과 겨울 경치도 또한 만들어져 있다. 《시경》 빈풍도(詩經豳風圖)에 의하여 인물·조수·초목 여러 가지 형용을 나무를 깎아 만들고, 절후에 맞추어 벌려 놓았는데 칠월 한 편의 일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집 이름을 흠경이라 한 것은 《서경》 요전(堯典)편에 ‘공경함을 하늘과 같이 하여, 백성에게 절후를 알려 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대저 당우 시대로부터 측후(測候)하는 기구는 그 시대마다 각자 제도가 있었으나, 당·송 이후로 그 법이 점점 갖추어져서 당나라의 황도유의(黃道遊儀)·수운혼천(水運渾天)과 송나라의 부루표영(浮漏表影)·혼천의상(渾天儀象)과 원나라의 앙의(仰儀)·간의(簡儀) 같은 것은 모두 정묘하다고 일렀다. 그러나 대개는 한 가지씩으로 되었을 뿐이고 겸해서 상고하지는 못했으며, 운용하는 방법도 사람의 손을 빌린 것이 많았는데 지금 이 흠경각에는 하늘과 해의 돗수와 날빛과 누수 시각이며, 또는 사신(四神)·십이신(十二神)·고인(鼓人)·종인(鍾人)·사신(司辰)·옥녀(玉女) 등 여러 가지 기구를 차례대로 다 만들어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서 그 연유를 측량하지 못하며, 위로는 하늘 돗수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만들은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 하겠다. 또 누수의 남은 물을 이용하여 기울어지는 그릇을 만들어서 하늘 돗수의 차고 비는 이치를 보며, 산 사방에 빈풍도(豳風圖)를 벌려 놓아서 백성들의 농사하는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또 앞 세대에는 없었던 아름다운 뜻이다. 임금께서 여기에 항상 접촉하고 생각을 깨우쳐서, 밤낮으로 근심하는 뜻을 곁들였으니, 어찌 다만 성탕(成湯)의 목욕반(沐浴盤)과 무왕의 호유명(戶牖銘)과 같을 뿐이리오. 그 하늘을 본받고 때를 좇음에 흠경하는 뜻이 지극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중하게 여기시니, 어질고 후한 덕이 마땅히 주나라와 같이 아름답게 되어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다. 흠경각이 완성되자 신에게 명하시어 그 사실을 기록하게 하심으로 삼가 그 줄거리를 적어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바치나이다.”


흠경각루 가산의 잡상과 내부 자격장치가 오랜 기간 훼손되어 방치됨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245권, 21년(1490 경술 / 명 홍치(弘治) 3년) 윤9월 6일(을유)  
시강관 조지서가 오랫동안 폐지되었던 흠경각의 제도를 부활시킬 것을 건의하다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시강관(侍講官) 조지서(趙之瑞)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예악 문물(禮樂文物)은 모두 세종(世宗)께서 창제하신 것으로, 흠경각(欽敬閣)의 제도는 극히 정교(精巧)하여 낮과 밤의 운행함이나 사시(四時)의 대서(代序)함이 조금도 차이가 없어서 국초(國初)에는 천문(天文)을 아는 자로 하여금 이를 점검·관찰하게 하였는데, 근래에는 오랫동안 폐지되어 왔습니다. 신이 일찍이 금내(禁內)에 들어가 보니, 그 설치(設置)한 곳에 풀과 나무의 여러 물건들이 꺾이고 훼손된 것이 많았으며, 자격루(自擊漏)의 제도 같은 것도 혹은 꺾이고 훼손되었으니, 뒷사람들이 어찌 성인(聖人)의 제작(制作)의 묘(妙)함을 알겠습니까? 청컨대 천문(天文)을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물을 부어서 교정(校正)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흠경각루 보수 완료. 전습을 위한 춘분, 하지, 추분에 10일 동안만 운영. 해자(海子)와 주전(籌箭)에 대한 역할 소개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277권, 24년(1493 계축 / 명 홍치(弘治) 6년) 5월 10일(계유)
좌승지 김응기가 저수에 대해 아뢰다

좌승지(左承旨) 김응기(金應箕)가 아뢰기를, “흠경각(欽敬閣)은 이미 보수를 끝냈습니다만, 보루각(報漏閣)에는 해자(海子)가 없으므로 늘 저수(貯水)하여 자격(自擊)하게 하더라도 썩지 않으나, 이 흠경각에는 연지(蓮池)가 있고 기기(器)가 있고 폭포(瀑布)도 있으므로 늘 해자에 저수합니다. 해자(海子)는 구리로 만들고 틈을 납(鑞)으로 때우므로, 납이 오래 물에 잠겨 있으면 반드시 삭으니, 늘 저수(貯水)하게 하면 새어서 그 아래에 있는 널빤지가 썩는데, 뒤따라서 널빤지를 갈기는 형세가 또한매우 어렵습니다. 보루각의 예(例)에 따라 늘 저수하여 자격(自擊)하게 합니까? 또는 춘분(春分)·하지(夏至)·추분(秋分) 때에만 저수하여 자격하게 합니까?”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해자(海子)에 저수(貯水)하는 것은 잠시 시험하여도 되겠지마는, 열 두 때에 자격(自擊)하는 것은 잠시도 폐(廢)하여서는 안되겠다. 폐하여 티끌이 그 구멍을 막으면 착오가 생길 듯하니, 늘 물을 대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김응기가 아뢰기를, “저수(貯水)하여 물대어 주전(籌箭)을 격동하여 자격(自擊)하게 하고 그 나머지 물은 폭포(瀑布)가 되기도 하고 기기(器)에 들어가기도 하니, 그 폭포와 기기를 폐하고 자격만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겨울철에는 얼므로 온돌이 있더라도 안되니 춘분·하지·추분 따위 달에 10일 동안만 저수하여 자격하면 전습(傳習)하는 자가 그 기술을 잊지 않고 혹 파손된 곳이 있더라도 보고 수리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흠경각루 수리 및 개작에 대한 청취한 후, 현재 흠경각루 개수를 통해 세종조를 계승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10권, 4년(1509 기사 / 명 정덕(正德) 4년) 11월 8일(병인)   
나례의 폐지에 대해 의논하다

…(생략)… 원종은 아뢰기를, “국가에서 천문에 정통하지는 못했어도, 일월의 영허(盈虛)와 사시(四時)의 소식(消息)이 틀리지 않게 역서(曆書)를 만들었습니다. 흠경각(欽敬閣)을 보면 세종대왕의 제도가 지극히 자세하고 지극히 정밀해서, 일시의 노리개가 아니라 민간의 사시 질고(四時疾苦)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신이 들은즉, 성종조의 김응기(金應箕)·유숭조(柳崇祖) 등이 전의 제도를 수리 개작하였다 하는데, 그 때의 장인도 만약 수년을 지나면 반드시 거의 다 죽어 없어질 것입니다. 지금 김안국(金安國)·성세창(成世昌) 등에게 명하여 천문을 학습하게 하고 있으나 흠경각은 대궐 안에 있어, 사람마다 출입하게 할 수는 없으니 내관(內官)과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및 관원들로 하여금 개수하게 하여, 선왕의 옛 제도를 후대에 유전하게 함이 어떨까 합니다.” 하였다.


흠경각 교정 진행중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30권, 12년(1517 정축 / 명 정덕(正德) 12년) 11월 25일(정유)  
임권 등이 종친을 접견하는 일과 관상감의 일 등에 관해 아뢰다

…(생략)… 성세창이 아뢰기를, “주(周)나라 때에는 영대(靈臺)를 쌓아 천문(天文)을 우러러보고 재앙을 굽어살폈으니,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삼가는 도리가 지극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 관상감(觀象監)을 설치한 까닭은 이를 위해서일 터인데, 하는 일이 지극히 소완(疏緩)하여 크게 본의에 어그러지며, 관상감의 관원 중에는 오성(五星)이 운행하는 도수를 잘 아는 자가 드무니, 어떻게 감히 천문을 우러러보아 인사(人事)를 살피겠습니까? 근일 목성(木星)이 태미원을 범하고 달이 또 태미원을 범하였는데, 이것은 다 성세(盛世)에 있어서는 안 될 재변입니다. 관상감의 일은 정승이 맡아 다스리니 중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없는데, 그 일을 중하게 여겨서 유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종조(世宗朝)는 치도(治道)가 지극히 갖추어졌는데, 간의대(簡儀臺) 같은 것을 다 그때에 세운 까닭은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삼가는 도리가 지극히 크고도 급하기 때문이었으니, 이제 대신(大臣)을 가려서 특별히 가르쳐야 합니다. 신과 김안국(金安國)이 보루각(報漏閣)과 흠경각(欽敬閣)의 교정(校正)을 맡았으나 아직도 미치지 못하고, 누각(漏刻)도 혹 어긋나는 것은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니니 유념하소서.” …(생략)…


흠경각루 가산의 기기(欹器)에 대해 논함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101권, 38년(1543 계묘 / 명 가정(嘉靖) 22년) 11월 2일(임인)  
승정원이 관상감 제조 윤은보 등의 의논으로 흠경각안의 기기에 대해 아뢰다

정원이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윤은보 등의 의논으로 아뢰기를, “흠경각(欽敬閣) 안에는 사절(四節)의 여러 가지 형상 및 농사의 어려움과 백성의 괴로움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만 기기(器)는 비면 기울고 알맞게 차면 반듯이 놓이고 가득차면 엎어지니, 그 형상이 장난에 가깝습니다. 공자가 기기를 논한 것은 70여 자(字)에 지나지 않되 지극히 상세하니, 아울러 써서 들이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유좌(宥坐)의 기구는 가까이 두고 경계하는 기구인데, 비면기울고 알맞게 차면 반듯이 놓이고 가득 차면 엎어진다고 한다. 아아! 대저 물건 중에 어찌 가득차도 엎어지지 않는 것이 있으랴. 가득 찬 것을 유지하는 데에는 도리가 있는데, 총명하고 예지(睿智)하더라도 어리석음으로 지키고, 공훈이 천하를 덮더라도 사양으로 지키고, 용력(勇力)이 세상에 떨치더라도 겁(怯)으로 지키고, 부유하기가 천하를 가졌더라도 겸손으로 지키는 것이 이른바 덜고 또 더는 도리이다.” 하였다.】하니, 답하였다. “기기는 경계하는 데에 가장 절실하니, 아뢴 대로 하라.”


관상감 제조 상진(商震)과 김익수(金益壽)에게 빈풍칠월의 형상과 잘 맞도록 잡상들의 개수를 지시함 <국조보감>

국조보감(國朝寶鑑) 제22권 신숙주(申叔舟)  
명종조 1 5년(경술, 1550)  

6월. 관상감에 명하여 중성(中星)을 측후하여 종묘 동구(宗廟洞口)의 앙부일구(仰釜日晷), 창경궁 새 보루각(報漏閣)의 누주(漏籌)와 부귀(浮龜)를 개수하도록 하였다. 다시 관상감 제조 상진(尙震), 김익수(金益壽) 등에게 명하여 흠경각(欽敬閣) 안에 만들어 놓은 열두 달의 사냥, 농사일 등에 관한 형상을 개수하여 빈풍(豳風) 칠월(七月)의 형상에 합치되도록 하는 데 힘쓸 것을 명하였다.


■  흠경각루 파손에 대비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 10권, 5년(1550 경술 / 명 가정(嘉靖) 29년) 8월 3일(갑자)
이기 등이 흠경각을 미리 살펴 파손에 대비할 것을 아뢰다

이기·상진·김익수(金益壽)【모두 관상감 제조이다.】가 아뢰기를, “신들이 흠경각(欽敬閣)을 지은 것을 보니 아주 정교해서 후세 사람들이 미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행령(行鈴)의 길을 미리 자세히 살펴서 그 제도를 익히게 하여 만약 파손이 있을 경우 개수하게 해야 합니다. 또 열두 달을 달마다 분명하게 써서 표시하고 전렵(畋獵)이나 농사 등의 일을 빈풍(豳風) 칠월시(七月詩)에 합치되도록 달에 따라 쓴 다음 그곳에 부표(付標)해 두어야 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기기(器)를 수리함. 임금 곁의 좌우에도 설치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 10권, 5년(1550 경술 / 명 가정(嘉靖) 29년) 11월 6일(을미)
영관상감사 이기가 흠경각의 기기를 다시 만들어 올리다

영관상감사(領觀象監事) 이기(李芑)가 아뢰기를, “전에 흠경각(欽敬閣)의 기기(器)가 비었는데도 기울지 않기 때문에 지금 다시 만들어 올립니다. 그런데 이 기구는 비단 흠경각에만 설치해 둘 것이 아니라, 바로 옛날 성인들이 권계(勸戒)하던 기구이니 언제나 좌우에 설치해 두고 물을 부으며 살피고 반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순자(荀子)가 이 기구를 그렸는데 받침대가 있었습니다. 이에 받침대를 갖추어 올립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이것은 성인이 권계하던 기구이니 자리 곁에 비치해 두고보며 반성하겠다. 물을 담아 둘 그릇과 물을 부을 그릇도 아울러 만들어 들이라.” 하였다.


경복궁 화재. 흠경각 불탐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 15권, 8년(1553 계축 / 명 가정(嘉靖) 32년) 9월 14일(정사)
경복궁의 대내에 화재가 나다

경복궁(景福宮)의 대내(大內)에 불이 났다.【태조가 즉위한 뒤 3년에 창건한 강녕전(康寧殿)·사정전(思政殿)·흠경각(欽敬閣)이 모두 불타 버렸다. 이 때문에 조종조로부터 전해 오던 진보(珍寶)와 서적 및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고명(誥命)과 복어(服御) 등도 모두 재가 되고 말았다. 이때 삼전(三殿)이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으므로, 궁인들이 변고를 듣고 달려가서 재물을 꺼내려 하였으나 하나도 꺼내지 못하고 서책 몇 궤짝만을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있던 작은 배에 내다가 실었을 뿐이었다. 이에 앞서 유성이 동쪽으로부터 서쪽을 향하고 빛이 서울을 환히 비추었으므로 화재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이 화재가 있었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대내가 모두 불타서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혼령을 놀라게 하였으니, 나의 마음이 망극하다. 문소전(文昭殿)과 연은전(延恩殿)에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하는 일을 예조에 말하라.”


경복궁 화재. 흠경각 불탐 <국조보감>

국조보감(國朝寶鑑) 제22권 신숙주(申叔舟)  
명종조 1 8년(계축, 1553)  

○ 9월. 경복궁의 대내(大內)에 불이 났다. 상이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 수를 줄였으며, 3일간 정조시(停朝市)하였다. 관원을 보내어 문소전(文昭殿)과 연은전(延恩殿) 및 종묘에 위안제를 지내고, 중외에 교서를 내려 구언(求言)하였다.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부덕하기 때문에 이렇게 혹독한 재변을 내린 것이다. 선왕의 법궁(法宮)을 복구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이렇게 극심한 흉년이 들었으니 힘을 헤아려서 해야 하겠다. 강녕전(康寧殿)과 사정전(思政殿)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므로 우선적으로 창건하지 않을 수 없다. 흠경각(欽敬閣)은 세종의 성지(聖智)에서 나온 것인데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으니, 더욱더 가슴 아프다. 이 또한 예전의 제도를 따라 편리한 대로 건축하라. 일에는 선후가 있으니, 그 밖의 역사는 모두 정지하라.” 하였다.


흠경각의 초양(草樣, 기초 토대)을 이룸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 15권, 8년(1553 계축 / 명 가정(嘉靖) 32년) 12월 26일(무술)
흠경각의 초양이 이루어지다

흠경각(欽敬閣)의 초양(草樣)이 이루어졌다.【흠경각은 처음에 세종 대왕이 개천술(蓋天術)1450) 을 취하여 강녕전(康寧殿) 서쪽에 각(閣)을 한 채 세우고, 이름을 흠경각이라 하였다. 그 안에 산(山)을 만들고, 태양(太陽)·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사상(四象) 및 십이신(十二神)을 산 위에 가설하고, 또 빈풍 칠월편(豳風七月篇)1451) 에 의하여 농사일의 형상을 사방에 나열하였다. 산 안쪽에 기계를 설치하여 물이 치는 힘을 빌어 움직이면서 하루의 시각을 알리게 하였으며, 또 사계절의 낮과 밤을 알 수 있게 하였는데, 그 제도가 매우 정교하였었다. 대내가 연소되자 조정에서는 다시 지을 수 있을까 염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초양이 이루어졌다. 상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본 다음 성공할 수 있음을 알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흠경각 중창(重創, 건립)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 17권, 9년(1554 갑인 / 명 가정(嘉靖) 33년) 8월 2일(경오)
김명윤·윤춘년·권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명윤(金明胤)을 호조 참판으로, 윤춘년(尹春年)을 가의 대부(嘉義大夫) 사헌부 대사헌으로【춘년이 앞서 윤원형의 심복이 되어 윤원로(尹元老)를 죽이자고 논했었는데, 이로 부터 권세가 날로 치열해져 사람들을 논박하고 정사를 변란시키는 것이 모두 그의 손에 있었다. 유자(儒者)로 자처하며 사류(士流)들과 결탁하여 겉으로는 마음이 맑고 허심탄회한 듯했으나 속은 실로 흉포하고 교활했다.】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춘년은 본래 재주가 보잘것없는데 겉으로는 염근(廉謹)한 체하여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논사(論思)1602) ·간쟁(諫諍)1603) ·풍헌(風憲)1604) 의 장관으로 있으면서 선왕들의 옛법을 차례차례 변경했는데 실지는 윤원형으로 굴혈(窟穴)을 삼았으므로 그가 건의한 일들은 모두 원형에게 품하고 하였으며 원형의 하는 짓 또한 협조하여 성취시켰다. 인심이 복종되지 않고 임금의 형세가 날로 고립되게 된 것은 모두 이들을 치우치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언사와 외모만 가지고 사람을 취하는 것을 공자는 경계했었으니, 위에 있는 사람들이 사람을 아는 데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권철(權轍)을 호조 참의로, 박민헌(朴民獻)을 절충 장군(折衝將軍) 의흥위 호군(義興衛護軍)으로, 박영(朴詠)을 절충 장군 의흥위 부호군으로 삼았다.【민헌과 영은 흠경각(欽敬閣)을 중창(重創)한 것으로 상가(賞加)한 것이다.】


흠경각 중창(重創, 건립)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권 이행(李荇 등)
비고편 동국여지비고 제1권  경도(京都)

연산군 때에, 채붕(彩棚 채색으로 홍예문처럼 만든 것)을 못 위에 매어 놓았는데, 첫째가 만세(萬歲)요, 둘째가 영춘(迎春)이요, 셋째가 진방(鎭邦)이다. 세 채붕이 산같이 높이 솟아서 매우 장려하였다. 흠경각(欽敬閣) 강녕전 서쪽에 있다. 세종 20년(1438)에 창건하고 천문 의기(儀器)를 두었는데, 후에 불타 명종 9년(1554)에 중건하였다. 김돈(金墩)의 기문이 있다.


흠경각 중창(重創, 건립) <연려실기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3권   이긍익(李肯翊)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찬술(纂述)과 제작(製作)

김돈(金墩)ㆍ김조(金銚)에게 명하여 천추전(千秋殿) 서편 뜰에다 조그마한 정각 한 간을 짓고 종이를 뭉쳐서 산을 만들되, 높이가 일곱 자쯤 되게 하여 정각 가운데에 두고, 그 안에 옥루(玉漏)를 설치하고 바퀴를 달아 물로 돌게 하였다. 또 사신(四神)ㆍ십이신(十二神)ㆍ고인(鼓人)ㆍ종인(鍾人)ㆍ사신(司辰)ㆍ옥녀(玉女) 등을 만들어 모든 기관들이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여 마치 신이 그렇게 하는 듯 하였다.하늘과 해의 도수와 구(晷)와 누수(漏水)의 시각이 위로 하늘의 운행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또 누수의 남은 물을 이용하여 기기(欹器)를 만들었는데, 기기는 비면 기울고 물이 중간쯤 차면 바르고 가득차면 엎어짐이 모두 옛 말씀과 같아서 이로써 천도(天道) 영허(盈虛)의 이치를 살피게 되었다.산의 사방에는 .t;빈풍(豳風). 칠월시(七月詩)에 의거하여 사시의 경치를 만들고 나무에 인물ㆍ새ㆍ짐승ㆍ초목의 형상을 새겨 만들어 그 절후에 맞게 배포하여 민생의 농사짓기 어려움을 보였다. 그 이름은 흠경각(欽敬閣)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서경》의 ‘흠약호천(欽若昊天) 경수인시(敬授人時)’의 뜻을 취한 것이었다. 《국조보감》 《필원잡기》 《대동운옥》

흠경각은 세종 갑인년(1434)에 창건되었으니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곁에 있었다. 뒤에 불탄 것을 명종(明宗) 갑인년(1554)에 그 옛터에 재건하였으나 또 임진왜란의 병화에 소실되었다. 광해군(光海君) 갑인년(1614)에 이르러 다시금 창덕궁 서린문(瑞麟門) 안에 세웠으니,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 번 갑인년을 만나서 세워졌었다. 세종조에 이룩된 정시의(定時儀)가 아직 완전히 남아 있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흠경각 중수에 대한 공궤(供饋)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 17권, 9년(1554 갑인 / 명 가정(嘉靖) 33년) 8월 19일(정해)
대왕 대비가 흠경각 중수를 감독했던 관원들을 대궐 뜰에서 공궤하다

대왕 대비가 흠경각(欽敬閣) 중수를 감독했던 관원들을 대궐 뜰에서 공궤(供饋)하고, 전교하였다. “국가가 비운(非運)을 만나 두 대왕께서 잇달아 승하하셨고, 온갖 재앙이 잇달아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므로 창생들이 먹고 살기가 어렵기에 항시 한탄스럽고 민망한 마음이 절실하였다. 불의에 조종들께서 세운 대궐이 하룻밤 사이에 불타 없어지고 세종(世宗)께서 창건한 흠경각도 함께 타버려 신묘한 그 제도를 다시 볼 수 없으므로 못내 통한스러웠는데, 경들이 성심으로 조치를 하여 기년(期年)이 못되어 그전대로 조성했기에 매우 아름답고 기쁘게 여긴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흠경각의 공사 중지 요청이 있었으나 계속 진행함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69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8월 1일(병술)
사간원이 흠경각의 공사를 멈추어 민생의 폐단을 덜기를 아뢰다

사간원이 아뢰었다. “토목 공사는 비용이 헤아릴 수 없게 들기 때문에 비록 평상시라 하더라도 오히려 억제하고 조절하는 것입니다. 현재 경비가 나날이 많아지고 국가의 저축이 고갈되었는데, 크고 작은 수리가 없는 해가 없습니다. 일삯으로 지급하는 요포(料布)의 비용이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끊임없이 들어가고 있는데 계속하여 지급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 군영(軍營)과 군보(軍堡)처럼 장사(將士)들이 들어가 거처할 곳들은 진실로 그만둘 수 없는 공사이겠으나, 흠경각(欽敬閣)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원래 긴급한 공사가 아닌데 뭇 장인들을 모두 모아 공사를 크게 하고 있습니다. 빨리 공사를 멈추라고 명하시어 민생의 폐단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소서.”


흠경각 건설도감이 건설 부지에 대해 아룀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69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8월 30일(을묘)
흠경각 건설 도감이 건설 부지에 대해 아뢰다

흠경각 건설 도감(欽敬閣建設都監)이 아뢰기를, “흠경각을 세우기에 합당한 땅을 신들이 일찍이 중사와 회동하여 살피고서 갖추 기록하여 아뢰었습니다. 오늘 또 중사를 따라와 술관(術官) 범철(泛鐵)로 하여금 살피게 하여, 그의 소견을 별도의 종이에 기록해서 아뢰고, 삼가 성상의 재결을 기다립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인양전(仁陽殿)의 터는 창덕궁과 너무 머니, 와린평(臥麟坪)을 술관으로 하여금 간심하게 하여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흠경각 내부 장치 수리에 대한 논의. 가산(假山)의 산 모형, 초목의 형상, 사신(司辰) 등의 인물상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80권, 6년(1614 갑인 / 명 만력(萬曆) 42년) 7월 9일(기미)
호조가 외방의 공물 중에 목면으로 바꿔 사신의 비용으로 쓰기를 건의하다

호조가 아뢰기를, “흠경각(欽敬閣)747) 의 목공(木工)과 단청(丹靑) 등이 끝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각내(閣內)에서는 일월(日月)의 출입과 주야 시간의 지속을 모두 기계로 측정하는데, 곧 그릇에 물을 담고 물로 방울을 움직이며 방울로 기계를 치게 하기 때문에 방울과 물이 운행하는 길을 모두 단련한 구리와 쇠로 만들었으며, 이미 대·중·소의 동기(銅器)를 주조하는 데에 든 구리가 5, 6천 근 정도만이 아닙니다. 이는 모두 본조에서 백방으로 준비하였고, 일체의 채색(采色)과 동철(銅鐵)의 값은 감히 별도로 외방에 배정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가산(假山)의 산 모형, 초목의 형상, 사신(司神) 등의 인물상(人物像) 중 나무로 만든 것에 있어서는 반드시 베로 싸고 칠을 입혀야만 비바람을 맞고도 썩지 않아 오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들어야 될 백저포(白苧布) 30필, 전칠(全漆)748) 20두(斗), 매칠(每漆)749) 3두를 도감이 이미 마련하여 지금 준비하려는 중인데, 이 또한 별도로 공물로 배정하여 민폐를 가중시킬 수 없으므로 방금 호조에서 대가를 주어 칠을 사들이도록 하였습니다. …(생략)…


흠경각 서루(西樓)의 수리를 조속히 끝내도록 명함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80권, 6년(1614 갑인 / 명 만력(萬曆) 42년) 7월 18일(무진)
흠경각 서루의 수리하는 일을 속히 끝마치라고 명하다

“흠경각(欽敬閣) 서루(西樓)를 수리하는 일을 속히 계획을 짠 다음 장인(匠人)들을 많이 모아 거처를 옮기기 전에 속히 역사를 끝마치라고 〈도감에 말하라.〉”


 흠경각 건설 도감이 천지호(天池壺)의 완성을 아룀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82권, 6년(1614 갑인 / 명 만력(萬曆) 42년) 9월 14일(계해)
흠경각 건설 도감이 천지호의 완성을 아뢰니 유근으로 하여금 명을 기록하도록 하다

흠경각 건설 도감(欽敬閣建設都監)이 아뢰기를, “신들은 들으니 평상시의 천지호(天池壼)에는 각명(刻銘)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천지호가 이미 완성되었으니 역시 명(銘)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흠경각의 여러 제조 가운데 호조 판서 유근(柳根)이 글솜씨가 뛰어나니, 그로 하여금 찬술(撰述)하도록 하여 계하(啓下)한 뒤에 새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흠경각 교정. 박자흥(朴自興)을 흠경각 교정청의 부제조로 차임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99권, 8년(1616 병진 / 명 만력(萬曆) 44년) 1월 16일(정해)
박자흥을 교정청의 부제조로 차임하여 교정일을 살피도록 하다

“박자흥(朴自興)이 일의 앞뒤를 잘 아니 흠경각 교정청(欽敬閣校正廳)의 부제조로 차임하여 그로 하여금 교정의 일을 그대로 살피도록 하라.”


흠경각의 교정이 거의 완료됨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06권, 8년(1616 병진 / 명 만력(萬曆) 44년) 8월 12일(경술)
흠경각이 교정이 완료되었다고 아뢰자 9월까지 진행하게 하다

흠경각(欽敬閣)이 아뢰기를, “흠경각의 교정(校正)이 여름부터 가을까지 한 치도 틀림이 없이 되어 조금도 결함이 없습니다. 이제 추분(秋分)도 이미 지났고, 이것은 늘 물을 담아두는 기구가 아니니, 지금 이후로는 교정을 정파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신들의 생각만 이러한 것이 아니라 장인(匠人)들의 말도 또한 그렇습니다.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9월까지 그대로 교정하게 하라.” 하였다.


흠경각 교정청이 야루(夜漏)의 교정에 대해 보고함. 탁수의 찌꺼기로 인해 시간이 잘 맞지 않음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06권, 8년(1616 병진 / 명 만력(萬曆) 44년) 8월 20일(무오)
흠경각 교정청이 야루의 교정에 대해 아뢰다

흠경각 교정청이 아뢰기를, “흠경각의 야루(夜漏)에 막힌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여 이달 16일부터 지금까지 나흘 밤을 착실히 교정을 하였더니 조금도 잘못된 곳이 없어 부절처럼 딱 맞았습니다. 지난번에 막혔던 것은 탁수의 찌꺼기가 끝부분의 구멍을 막아서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시각이 금루(禁漏)와 차이가 나는 것은, 금루가 옳고 흠경각 안의 것이 잘못되어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난리 이후에 금루의 경점(更點)에 대해서 모두들 맞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흠경각 안의 것은 전주(箭籌)에 맞추어 보건대 조금도 차이가 없이 딱 맞았으니 흠경각의 시각이 옳다고 하는 것은 또한 억측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누주통의(漏籌通義)》에 ‘추분 이후에는 인정(人定)은 술초(戌初) 1각(刻)에 하고 파루(罷漏)는 인정(寅正) 초각(初刻)에 한다.’고 하였는데, 흠경각에서 시각을 알리는 것이 이들 시각과 서로 일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루(晝漏)는 묘시에서 유시까지 교정에 오차가 없었습니다. 낮과 밤의 길이를 계절에 따라 고르게 나누었으니 야루에 혹 오차가 있다면 주루에 오차가 없을 리는 만무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미진하게 될 염려가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오래되면 혹 잘못이 생길까 염려되므로 이전의 계사대로 이달 말까지는 밤마다 교정을 할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흠경각 교정청이 야루의 교정 상황을 보고함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06권, 8년(1616 병진 / 명 만력(萬曆) 44년) 8월 29일(정묘)
흠경각 교정청이 야루의 교정 상황을 보고하다

흠경각 교정청이 아뢰기를, “흠경각을 밤낮으로 교정(校正)하였는데, 감조관(監造官)들이 매양 조금도 오차가 없다고 할 뿐만 아니라 신 이충(李沖)이 끝까지 교정을 하였는데도 잘못됨이 없었습니다. 때로 막히는 경우가 있다고 한 일에 대해서는, 신들의 생각에도 의아스러우니, 성상께서 혹 미진한 바가 있을까를 염려하시어 교정을 정파하라는 명을 못 내리고 계신 것이 마땅합니다. 감조관은 원래 6명인데, 각각 밤낮으로 매 1각(刻)에 분정(分定)하여 교정하게 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전히 오차가 없다고 보고를 하고 분정기(分定記)를 입계하고서 뒷날 어떤 시각에 한 번 정도 오차가 있는 것이라면 이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에 불과한 것이고, 만약 날마다 오차가 있게 되면 당초에 교정을 착실하게 하지 않고서 범연하게 오차가 없다고 거짓욀¼로 보고를 한 것이 분명할 터이니, 당해 감조관에게 무겁게 책임을 물으소서. 오늘 밤은 감조관 6명을 모두 들어와 교정을 보게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흠경각을 춘분 이후부터 관상감 제조 이하가 상세히 교정할 것을 지시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11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월 18일(갑신)
흠연각을 상세히 교정하도록 전교하다

“흠경각(欽敬閣)을 춘분 이후부터 관상감 제조 이하가 상세히 교정해서 착오나지 않게 하라.”


흠경각 터에 전각을 짓고자 함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15권, 6년(1655 을미 / 청 순치(順治) 12년) 11월 17일(정유)
자전이 거처하는 수정당이 좁아 수리하는 일을 대신들과 의논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전이 일찍이 통명전(通明殿)에 거처하셨는데, 재차 몸이 편찮으셨다. 지난해 비록 더러운 물건들을 깨끗이 제거하였지만 그대로 이 전에 계신다는 것이 마음에 몹시 불안하였기 때문에 여름에 수정당(壽靜堂)으로 받들어 모신 것이다. 그런데 이곳도 산을 등지고 땅이 비좁아 오래 거처하시기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또 옛 총부(摠府)에 옮겨 모시려고 하는데, 총부도 또한 협소하여 불편하다. 나는 넓다란 궁전에 살면서 자전을 모실 만한 적합한 자리가 없으니, 내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이런 시기에 건축 공사를 한다는 것이 곤란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사세가 이와 같으니, 흠경각(欽敬閣) 터에 하나의 전을 세우고 싶다.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사세가 이와 같으니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심지원(沈之原)이 아뢰기를, “누가 감히 이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흠경각의 옛 터는 바로 홍문관의 북쪽으로 본래 깊숙한 곳이 아니니, 마땅히 앞에 한 층의 누각을 세워서 건너편 여염집이 바라다 보이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 이 역사는 비교적 큰 일이고, 또 인경궁(仁慶宮)의 목재와 기와를 이미 다 써버렸으므로 모름지기 별도로 목재와 석재를 준비해야만 바야흐로 공사를 시작할 수 있다. 경들이 물러가서 방도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생략)…


흠경각 터에 전각을 짓고자 함 <국조보감>

국조보감(國朝寶鑑) 제38권 신숙주(申叔舟)
효종조 2 6년(을미, 1655)  

상이 자의대비(慈懿大妃)를 섬김에 있어 있는 정성과 갖출 예를 다하였다. 대비가 병을 잘 앓았는데, 상은 그때마다 봉양과 병조리와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대비가 거처하는 곳이 좁다 하여 옛 흠경각(欽敬閣) 터에다 친히 자리를 잡고 궁전을 따로 건립하여 이름을 만수(萬壽) 혹은 춘휘(春暉)라 하고 그 건축에 종사한 역부들 신요(身徭)도 면제해 주었던 것이다.


흠경각을 철거하고 그 목재와 기와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논함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15권, 6년(1655 을미 / 청 순치(順治) 12년) 11월 23일(계묘)
대신들과 궁을 수리하는 일을 상의하다

…(생략)… 심지원이 아뢰기를, “흠경각(欽敬閣)도 철거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철거하여 그 목재와 기와를 쓰고, 총부(摠府)의 목재와 기와는 도로 총부에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생략)…


김육이 흠경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대비전을 세우는 것을 불가함을 논함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15권, 6년(1655 을미 / 청 순치(順治) 12년) 12월 4일(갑인)
김육이 흠경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대비전을 세우는 것의 불가함을 논하다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예전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이 창경궁(昌慶宮)을 수강궁(壽康宮)의 터에 세워 정희(貞熹)·인수(仁粹)·안순(安順) 세 대비(大妃)를 여기에 모시고, 명절이나 또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는 때에는 문안한 뒤 이어서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뭇 신하들의 조회를 받았다 하니, 대개 창경궁은 대비를 위해서 세운 것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1백 60여 년이 되었습니다. 지난번 자전께서 체후가 편치 못하시므로 총부(摠府)로 옮겨 모셨는데, 실로 오래 거처하실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또 자전을 받들어 수정당(壽靜堂)에 옮겨 모셨는데, 신은 삼가 생각하기를 ‘성상의 마음은 가까운 곳에 모셔두고 아침 저녁으로 봉양하는 정성을 다하고자 하시는 것이니, 성상의 마음이 바로 성종 대왕의 마음이구나.’ 하였습니다. 이번에 삼가 듣건대, 경연 석상에서 ‘수정당이 산을 등지고 비좁아 궁색하기 때문에 흠경각(欽敬閣)의 터에다 따로 전을 지으려 한다.’고 하교하셨다 하니, 봉양을 극진히 하시는 전하의 정성은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여러 신하들은 거룩한 덕을 받들어 따를 것이며 누가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다만 어리석은 신하의 소견으로는 불편한 것이 한 가지, 불가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 점이 한스럽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합니다.


대개 제왕의 거처는 깊숙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홉 겹으로 안을 장엄하게 하고 빙 둘러 건물을 밖에 나열하는데, 더구나 후비(后妃)가 거처하는 곳이겠습니까. 흠경각 자리는 인정전 밖에 있는데, 산기슭에 노출되어 매우 깊숙하지 못하며, 금호(金虎)·요금(曜金) 두 문이 좌우에 있고 서영(西營)·북영(北營)이 그 밖에 있으므로 달리는 거마 소리가 시끄러워 새벽부터 저녁까지 소란합니다. 그리고 정전이 서쪽을 향하게 되어 바람이 몰아치는 가을과 겨울에는 반드시 배나 더 추울 것으로 누각을 겹으로 짓는다 하더라도 추위를 차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전께서 편안히 계시기에는 반드시 수정당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불편하다는 한 가지입니다. 예로부터 태후가 거처하는 곳은 반드시 대내(大內)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조(東朝)라고 말하였습니다. 창경궁이 동쪽에 있는 것도 또한 이런 까닭입니다. 정전의 서쪽 구석으로 외부 가까운 자리에 옮겨 짓는 것은 굽어져 있는데다 또 멀며, 왼쪽을 숭상하는 예전의 예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 불가하다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흠경각은 바로 세조 대왕(世祖大王)이 세운 것입니다. ‘하늘을 공경히 따라 삼가 백성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절기를 나누어 준다.[欽若昊天敬授人時]’는 것은, 요(堯)임금이 하늘을 본받아 도를 행해서 백성을 다스린 것입니다. 이 각을 세운 것은 실로 천고의 제왕들에게 없었던 아름다운 뜻입니다. 성인께서 제작을 지극히 정밀하게 하셨으니 만세에 전해가며 법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비록 다시 설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어찌 아울러 그 각까지 철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불가하다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이 흠경각은 본래 경복궁에 있었는데 현재 거처하시는 창덕궁에도 또한 있었습니다. 각각 두 곳에 건립하여 그 이름을 존속시켰고, 열성(列聖)들이 서로 계승하며 따라서 말미암는 옛 제도로 삼았는데, 지금 만일 이를 철거해 버린다면 후세에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공자는 초하루를 고(告)하는 데 올리는 희생양을 없애지 않고자 하였습니다.922) 예(禮)가 양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자가 그 양을 보존하고자 한 것은 그 예를 아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성스럽고 신령스런 분이 처음으로 세운 옛 누각이겠습니까. 신의 미미한 정성은 단지, 자전께서 평소 계시던 곳에 편안히 계시고 성상께서 세종·성종 등 열성의 아름다운 뜻을 상실하지 않기를 원할 뿐입니다. 죽을 날이 가까워 노망이 들었으므로 저촉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너그럽게 살피시고 다시 조정에 하문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니, 그 차자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여 아뢰기를, “이 차자의 내용을 보건대, 고례를 논거로 인용하여 뜻이 매우 올바릅니다. 대내의 동쪽에 만일 지을 만한 터가 있다면 이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할 것이나, 동편에 공한지가 없다는 것에 대해 신들이 일찍이 탑전에서 친히 성상의 하교를 받았습니다. 흠경각에 대해서는 《여람(輿覽)》을 상고해 보니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서쪽에 있었고, 창덕궁에는 나타나는 곳이 없습니다. 비록 조종조의 옛 터는 아니지만, 흠경으로써 이름하였으니 굳이 철거할 필요가 없이 양(羊)을 보존하는 뜻을 붙여야 합니다. 그러나 달리 옮겨 지을 만한 곳이 없으며, 정전을 이곳에 짓는 것은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바이니, 백 번 생각해 보아도 달리 변통할 길이 없습니다. 신들의 말은 형세를 논한 것이고, 차자 가운데의 논의는 고제(古制)를 따르려는 것입니다.”


김육이 흠경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대비전을 세우는 것을 불가함을 논함 <임하필기>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3권 이유원(李裕元)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동조(東朝)의 만수전(萬壽殿)

효종 6년(1655)에 상이 자의대비(慈懿大妃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의 처소가 좁다 하여 친히 흠경각(欽敬閣)의 옛터를 살펴보고는 이곳에 따로 전각을 지어 드리고 그 이름을 만수전이라고 하였다. 김육(金堉)이 상소하기를, “흠경각이 있던 자리는 인정전(仁政殿)의 바깥에 있어서 산기슭이 드러나고 금호문(金虎門)과 요금문(曜金門)의 두 문이 좌우에 있으며 또 서영(西營)과 북영(北營)이 그 바깥에 있어서 요란하고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예로부터 태후의 거처는 반드시 대내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일러 동조(東朝)라고 하였으며 창경궁(昌慶宮)이 동쪽에 있는 것도 역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를 정전(正殿)의 서쪽인 외부와 가까운 곳에 옮겨 설치하여 장소가 회둘러 있는 데다 멀기까지 하니 이것은 왼쪽을 숭상하는 고례(古禮)의 취지에 맞지 않습니다.” 하였다.


김육이 흠경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대비전을 세우는 것을 불가함을 논함 <잠곡유고>

잠곡유고(潛谷遺稿) 제6권 김육(金堉)
소차(疏箚)  수리도감(修理都監)에 대해 논하는 차자 을미년 12월 4일

삼가 신이 듣건대, 예전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창경궁(昌慶宮)을 수강궁(壽康宮)의 터에 세워, 정희(貞熹), 인수(仁粹), 안순(安順) 세 대비(大妃)를 여기에 모시고 정월 초하루나 동지, 명절 및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에 문안한 뒤, 이어서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뭇 신하들의 조회를 받았다고 합니다. 대개 창경궁은 대비를 위해서 세운 것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170여 년이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자전(慈殿)께서 체후가 편치 못하시므로 도총부(都摠府)로 옮겨 모셨는데, 이는 실로 한때의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으로, 오랫동안 거처하실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효성스러운 생각이 무궁하여서 수정당(壽靜堂)을 수리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에 신은 삼가 생각하기를, ‘성상의 마음은 가까운 곳에 모셔 두고서 아침저녁으로 봉양하는 정성을 다하고자 하시는 것이니, 성상의 마음이 바로 성종 대왕의 마음과 같구나.’라고 하면서 송축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삼가 듣건대, 경연 석상에서 “수정당이 산을 등지고 있는 탓에 비좁아서 궁색하기 때문에 흠경각(欽敬閣)의 터에다 따로 전을 지으려고 한다.”고 하교하셨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자전을 봉양하는 정성을 지극하게 하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 신하들은 거룩한 덕을 받들어 따를 것으로, 누가 감히 받들어 봉행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어리석은 신의 소견으로는 불편한 것이 한 가지, 불가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이 한스럽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드리고자 합니다.


무릇 제왕의 거처는 깊숙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홉 겹으로 안을 장엄하게 하고 빙 둘러서 건물을 밖에 나열합니다. 그런데 더구나 후비(后妃)들이 거처하는 곳이겠습니까. 흠경각 자리는 인정전(仁政殿) 밖에 있는데, 산기슭에 노출되어 있어서 아주 얕고 좁으며, 금호문(金虎門)과 요금문(曜金門) 두 문이 좌우에 있고, 서영(西營)과 북영(北營)이 그 밖에 있으므로, 달리는 거마 소리가 시끄러워 새벽부터 저녁까지 소란합니다. 그리고 정전의 형세가 서쪽을 향하여 바람을 마주 대하게 되어 있는 탓에 가을과 겨울에는 반드시 배나 더 추울 것인바, 누각을 겹으로 짓는다고 하더라도 추위를 차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전께서 편안하게 계시기에는 반드시 수정당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불편하다고 한 한 가지입니다.

예로부터 태후가 거처하는 곳은 반드시 대내(大內)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조(東朝)라고 말하였습니다. 창경궁이 동쪽에 있는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정전의 서쪽 구석으로 외부와 가까운 자리에 옮겨 짓는 것은 굽어져 있는데다 또 멀며, 왼쪽을 숭상하는 옛날의 예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불가한 점입니다.


흠경각은 바로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 세운 것입니다. ‘하늘을 공경히 따라 삼가 백성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절기를 나누어 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는 것은 요(堯) 임금이 하늘을 본받아 도를 행해서 백성을 다스린 것입니다. 이 흠경각을 세운 것은 실로 천고의 제왕들에게 없었던 아름다운 뜻이며, 또한 천고의 제왕들이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인께서 제작을 지극히 정밀하게 하셨으니 만세에 전하여 법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 비록 다시 설치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각까지 아울러서 철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두 번째 불가한 점입니다.

이 흠경각은 본디 경복궁에 있었는데, 현재 거처하시는 창덕궁에도 또한 있었습니다. 각각 두 곳에 건립하여 그 이름을 존속시켰고, 열성(列聖)들께서 서로 계승하여 따라서 말미암는 옛 제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일 이를 철거해 버린다면 후세에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공자는 초하루를 고하는 데 올리는 희생양을 없애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예가 양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자가 그 양을 보존하고자 한 것은 그 예를 아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성스러운 분이 처음으로 세우고 신령스런 분이 후대에 전한 옛 누각이겠습니까.

신의 미미한 정성은 단지 자전께서 몸과 마음이 편한 곳에 계시고, 성상께서 세종과 성종 등 열성들의 아름다운 뜻을 상실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죽을 날이 가까워 노망이 들었으므로 성상의 위엄을 거스른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성상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다시금 조정에 하문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결정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대비를 봉양하기 위해 흠경각 옛 터에 만수전과 춘휘전을 세움 <국조보감>

국조보감(國朝寶鑑) 제38권   신숙주(申叔舟)
효종조 2 6년(을미, 1655)

상이 자의대비(慈懿大妃)를 섬김에 있어 있는 정성과 갖출 예를 다하였다. 대비가 병을 잘 앓았는데, 상은 그때마다 봉양과 병조리와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대비가 거처하는 곳이 좁다 하여 옛 흠경각(欽敬閣) 터에다 친히 자리를 잡고 궁전을 따로 건립하여 이름을 만수(萬壽) 혹은 춘휘(春暉)라 하고 그 건축에 종사한 역부들 신요(身徭)도 면제해 주었던 것이다.


대비를 봉양하기 위해 흠경각 옛 터에 만수전과 춘휘전을 세움 <임하필기>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3권 이유원(李裕元)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동조(東朝)의 만수전(萬壽殿)

효종 6년(1655)에 상이 자의대비(慈懿大妃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의 처소가 좁다 하여 친히 흠경각(欽敬閣)의 옛터를 살펴보고는 이곳에 따로 전각을 지어 드리고 그 이름을 만수전이라고 하였다. 김육(金堉)이 상소하기를, “흠경각이 있던 자리는 인정전(仁政殿)의 바깥에 있어서 산기슭이 드러나고 금호문(金虎門)과 요금문(曜金門)의 두 문이 좌우에 있으며 또 서영(西營)과 북영(北營)이 그 바깥에 있어서 요란하고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예로부터 태후의 거처는 반드시 대내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일러 동조(東朝)라고 하였으며 창경궁(昌慶宮)이 동쪽에 있는 것도 역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를 정전(正殿)의 서쪽인 외부와 가까운 곳에 옮겨 설치하여 장소가 회둘러 있는 데다 멀기까지 하니 이것은 왼쪽을 숭상하는 고례(古禮)의 취지에 맞지 않습니다.” 하였다.


대비를 봉양하기 위해 흠경각 옛 터에 만수전과 춘휘전을 세움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권 이행(李荇 등)
비고편 동국여지비고 제1권  경도(京都)

…(생략)… 만수전(萬壽殿) 효종 6년(1655)에 흠경각(欽敬閣) 옛터에 짓고 자의대비(慈懿大妃)를 모셨으며, 또 춘휘전(春暉殿)을 지었는데 모두 금호문(金虎門)과 요금문(曜金門) 두 문 안에 있다. 숙종 13년(1687)에 화재를 당한 뒤로 폐지되었다. …(생략)…


경복궁에서 발견한 석각천문도(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관하기 위해 흠경각 재건 <증보문헌비고>

증보문헌비고(新增東國輿地勝覽) 제3권 상위고(象緯考) 3 의상2

…(생략)… 영조 46년(1770)에 관상감(觀象監)에 각(閣)을 세우고, 그 속에 국초(國初)의 석각 천문도(石刻天文圖)를 보관하였다. 임금이 액자를 써서 흠경각(欽敬閣)이라 이름하였다. …(생략)…


경복궁에서 발견한 석각천문도(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관하기 위해 흠경각 재건 <임하필기>

임하필기(林下筆記) 제27권   이유원(李裕元)
춘명일사(春明逸史) 흠경각(欽敬閣)

내가 서운감 제조(瑞雲監提調)로 있을 때에 본감(本監)의 흠경각에 소장된 석각천문도(石刻天文圖)를 봉심(奉審)하였는데, 이것은 세종조(世宗朝)의 구물(舊物)이었다. 어제 흠경각기(御製欽敬閣記)가 있었는데, 영묘(英廟) 46년(1770)에 건립한 것이었다. 살피건대, 김육(金堉)이 말하기를, “흠경각은 선덕(宣德) 갑인년(1434)에 처음 창건(創建)하였는데 경복궁(景福宮)의 강녕전(康寧殿) 옆에 있었다. 화재를 만나 가정(嘉靖) 갑인년(1554)에 재건(再建)하였으나, 또 병화(兵火)를 당하여 만력(萬曆) 연간에 창덕궁(昌德宮)의 서린문(瑞麟門) 안에 개건(改建)하였다. 세종조(世宗朝)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가 이때까지도 남아 있었는데, 효종(孝宗) 병신년(1656)에 이를 헐어 내고 만수전(萬壽殿)을 지었다.”고 하였다.


경복궁에서 발견한 석각천문도(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관하기 위해 흠경각 재건 <연려실기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7권   이긍익(李肯翊)
관직전고(官職典故)  제사(諸司) 관상감(觀象監)

영종 46년 이 관상감에 집[閣]을 세워 돌에 새긴 천문도(天文圖)를 간수하게 하고, 다시 ‘흠경(欽敬)’이라 명명(命名)하였다.


흠경각 보수를 명함. 흠경각루는 부재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39권, 18년(1794 갑인 / 청 건륭(乾隆) 59년) 3월 24일(신해)
호조 판서 심이지에게 흠경각을 보수하도록 명하다

호조 판서 심이지가 아뢰기를, “신이 어제 명을 받고 옛 도총부 터와 보루각(報漏閣) 터를 돌아보고 도형을 만들어 바칩니다. 그러나 흠경각(欽敬閣)은 들보와 서까래가 썩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처럼 큰 집을 그 누가 손을 댈 수 있겠는가. 세 칸짜리 누수각(漏水閣)은 단지 그 이차적인 일에 속한다. 틀림없이 쓰러질 염려가 있음을 알면서도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참으로 미안한 노릇이다. 흠경각은 이름을 새겨보고 뜻을 생각하면 실로 소중함이 있다. 진실로 쓸모가 없다면 주(周)나라의 명당(明堂)까지도 맹자(孟子)는 헐어버리기를 청하였다. 이 건물도 헐어버리려면 철거해 버리고 남겨두려면 수리해야 될 것이니 정말 수리하려 한다면 설사 손대기 어렵다 하더라도 어찌 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 하였다.


이지가 아뢰기를, “고쳐 건축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니,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단지 기와만 고쳐 덮고 썩고 비 새는 곳이나 손질하여도 수리한 태가 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건물은 세종(世宗) 때 지은 집으로 우리 나라에서 제일 웅장한 건축인데 지금껏 우뚝 솟아 있어 마치 영광전(靈光殿)과 흡사하다. 이 건물을 만일 수리하면 조상의 사업을 계승하는 한 가지 일이 될 것이다. 12선동(仙童) 등의 의기(儀器)를 만드는 법이 문헌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어서 충분히 모방하여 설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희정당(熙政堂) 앞에 있는 자명종(自鳴鍾)의 물방울이 부딪쳐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도 바로 옛날의 남겨준 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런 의기는 정우태(丁遇泰) 같은 사람은 충분히 만들 수 있겠으나, 지극히 정교한 제도를 모방함에 있어서는 이런 뛰어난 장인(匠人)을 어디에서 구하여 오겠는가.” 하였다.


경복궁 화재. 흠경각 불탐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13권, 13년(1876 병자 / 청 광서(光緖) 2년) 11월 4일(신유)
경복궁에 화재가 일어나다

경복궁(景福宮)에 화재가 일어났다.【교태전(交泰殿), 인지당(麟趾堂), 건순각(健順閣), 자미당(紫薇堂), 덕선당(德善堂), 자경전(慈慶殿), 협경당(協慶堂), 복안당(福安堂), 순희당(純熙堂),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 함원전(含元殿), 흠경각(欽敬閣), 홍월각(虹月閣), 강녕전(康寧殿)이다.】 830여 간이 연달아 불길에 휘감겼다. 화재가 갑자기 일어났으며 불기운이 매우 빨랐다. 순식간에 여러 전각(殿閣)이 몽땅 재가 되었으며, 열조(列朝)의 어필(御筆)과 옛 물건은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대보(大寶)와 세자의 옥인(玉印) 외에 모든 옥새와 부신(符信)이 전부 불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