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의대 설립 목적과 중요성]

■ 간의대 설립목적1

세종 19년(1437 정사 / 명 정통(正統) 2년) 4월 15일(갑술)

其簡儀臺則承旨金墩作記曰 宣德七年壬子秋七月日 上御經筵 論曆象之理 乃謂藝文館提學臣鄭麟趾曰 我東方邈在海外 凡所施爲 一遵華制 獨觀天之器有闕 卿旣提調曆算矣 與大提學鄭招講究古典 創制儀表 以備測驗 然其要在乎定北極出地高下耳, 可先制簡儀以進 於是臣鄭招、臣鄭麟趾掌稽古制 中樞院使臣李蕆掌督工役 先製木樣 以定北極出地三十八度 少與《元史》所測合符 遂鑄銅爲儀 將成 命戶曹判書臣安純 乃於後苑慶會樓之北 築石爲臺 高三十一尺、長四十七尺、廣三十二尺 繚以石欄 顚置簡儀 敷正方案於其南 臺之西植銅表高五倍八尺之臬 斲靑石爲圭 圭面刻丈尺寸分 用影符取日中之影 推得二氣盈縮之端 表西建小閣 置渾儀渾象 儀東象西 渾儀之制 歷代不同

그 간의대(簡儀臺)는 승지 김돈(金墩)이 기록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선덕 7년 임자년 가을 7월 일에 성상께서 경연에 거둥하여 역상의 이치를 논하다가, 예문관 제학 신정인지에게 이르기를, ‘우리 동방이 멀리 바다 밖에 있어서 무릇 시설하는 바가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에 따랐으나, 홀로 하늘을 관찰하는 그릇에 빠짐이 있으니, 경이 이미 역산의 제조(提調)가 되었으므로, 대제학 정초(鄭招)와 더불어 고전을 강구하고 의표를 참작해 만들어서 측험(測驗)하는 일을 갖추게 하라. 그러나 그 요는 북극이 땅 위에 나온 높낮이를 정하는 데 있다. 먼저 간의를 만들어 올림이 가하다.’고 하시므로, 이에 신 정초와 신 정인지는 옛 제도를 상고하는 일을 맡고, 중추원 사 신이천은 공역(工役)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먼저 나무로 모양을 만들어, 북극이 땅에서 38도가 나온 것을 정하니, 《원사(元史)》에 측정한 것과 조금 합하므로, 드디어 구리로 간의를 만들어 장차 이룩되매, 호조 판서 안순(安純)에게 명하여 후원(後苑) 경회루 북쪽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드니, 높이는 31척이고, 길이는 47, 넓이는 32척인데, 돌로 난간을 두르고 간의를 엎드려 놓았다.


■ 간의대 설립목적2

세종 20년(1438 무오 / 명 정통(正統) 3년) 3월 4일(무자)

傳旨禮曹 簡儀臺 專爲候察天氣 以授民時 旁置圭表渾象渾儀 皆是觀天之器 別差官員 以候天文 非長久之計 今後令書雲觀主之 每夜五人入直 以候天氣

예조에 전지하기를, “간의대(簡儀臺)는 오로지 천기(天氣)를 살펴서 백성에게 절후(節候)를 알려 주기 위한 것이며, 옆에 규표(圭表)·혼상(渾象)·혼의(渾儀)를 설치한 것도 모두 천기를 보는 기구이다. 따로 관원을 보내어 천기를 살피도록 한 것은 장구한 계책이 아니니, 금후로는 서운관(書雲觀)에서 주장하게 하되 밤마다 다섯 사람씩 입직시켜서 천기를 살피게 하라.”하였다.


■ 간의대 설립목적3

세종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13(기미)

上命趙瑞康、成奉祖 率術者更相營宮之地于簡儀臺舊基 仍謂曰 時方多事 民未小康 又興工役 予豈樂爲哉 慕華館 乃迎詔勑之所 慶會樓 乃集君臣之處 繼祖宗之志而新之 多用民力 至今悔之 又簡儀臺 期傳於子孫萬世 今遽毁之 心甚難焉 然人君傳位嗣子 不可與嗣王同居一宮 且或父旣薨而母在 嗣王安能侍居一宮乎 爲此欲構此宮 第其地卑下 不稱予意 其更相之

임금이 조서강(趙瑞康)과 성봉조(成奉祖)에게 명하여 지술(地術)하는 사람을 거느리고 다시 궁(宮)을 영조(營造)할 자리를 간의대(簡儀臺) 옛터에다 가리게 하고, 인하여 이르기를, “때가 바야흐로 일이 많고 백성이 편안하지도 못한데, 또 공사를 일으키는 것을 내 어찌 즐겨서 할 것이랴마는, 모화관(慕華館)은 중국 칙서를 맞이하는 곳이요, 경회루(慶會樓)는 임금과 신하의 집회하는 곳이어서 조종(祖宗)의 뜻을 이어받아 새롭게 하느라고 민력을 많이 썼으므로, 이제 이르러 후회가 된다. 또 간의대(簡儀臺)는 자손 만대에 전하기를 기약했던 것인데, 이제 갑자기 헐어 버리려 하니 마음이 심히 괴롭다. 그러나 임금이 아들에게 자리를 전해 주고서 아들 임금[嗣王]과 더불어 같은 궁에 함께 거처하는 것은 불가하다. 또 부왕(父王)이 이미 돌아가고 어머니가 계실 때 아들 임금이 어떻게 한 궁에서 모시고 있을 것이냐. 이 때문에 이궁을 지으려 하는데 마침 그 지형이 낮아서 내 마음에 맞지 아니하니, 다시 땅을 살펴보라.”하였다.


■ 간의대 축조의 중요성1

세종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421(병오)

傳旨工曹 今當農月 雨澤愆期 宗廟鑿池、簡儀臺圭表外 凡諸營繕 一皆停罷

공조에 전지하기를, “지금 농사철을 당했으나 비가 제때에 오지 않으니, 종묘에 못을 파는 일과 간의대(簡儀臺)와 규표(圭表)를 설치하는 일 이외에는 여러가지 영선(營繕)하는 일을 일체 모두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 간의대 축조의 중요성2

단종 1(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 925(무인)

許詡曰 景福宮 祖宗審其都邑 明堂創成者也 其後太宗雖時御昌德宮 凡有大事 則皆就景福宮行之 蓋以爲根本之地故也 世宗時立簡儀臺置原廟 百僚庶司皆備 所以爲萬世法宮者也

허후(許詡), ‘경복궁은 조종께서 도읍(都邑)의 명당(明堂)을 살펴서 창건하여 이룩한 것인데, 그 뒤에 태종께서 비록 때로 창덕궁에 거처하시는 일이 있었으나, 무릇 큰 일이 있으면 모두 경복궁에 나아가서 행하였으니, 대저 근본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세종 때에 간의대(簡儀臺)를 세우고 원묘(原廟)를 두고, 백료(百僚)의 모든 사(司)를 모두 갖추었으니, 만세(萬世)의 법궁(法官)이 되는 까닭이다.


■ 간의대 설립목적4

중종 12(1517 정축 / 명 정덕(正德) 12) 1125(정유)

世昌曰 周時築靈臺 仰觀天文 俯察妖祲 其敬天謹災之道 至矣 我國觀象監之設 蓋爲此也 而其所事 至爲疎緩 大違本意 觀象監官員 能知五星之纏度者 鮮矣 何敢望仰觀天文 以察人事乎 近日木星犯太微 月又犯太微 此皆盛世不宜有之災變也 觀象監事 政丞領之 不爲不重 而未有重其事而留意者 世宗朝 治道至備 如簡儀臺之類 皆創於其時 以敬天謹災之道 至大且急故也 今可揀選文臣 別用敎之也 臣與金安國 當校正報漏閣與欽敬閣 而時未及焉 漏刻亦或差違 誠非細故 願須留念 上曰 天文事至大 觀象監官員有何所知 亦何能爲之 故已令年少文臣肄習矣

성세창이 아뢰기를, “(周)나라 때에는 영대(靈臺)를 쌓아 천문(天文)을 우러러보고 재앙을 굽어살폈으니,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삼가는 도리가 지극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 관상감(觀象監)을 설치한 까닭은 이를 위해서일 터인데, 하는 일이 지극히 소완(疏緩)하여 크게 본의에 어그러지며, 관상감의 관원 중에는 오성(五星)이 운행하는 도수를 잘 아는 자가 드무니, 어떻게 감히 천문을 우러러보아 인사(人事)를 살피겠습니까? 근일 목성(木星)이 태미원을 범하고 달이 또 태미원을 범하였는데, 이것은 다 성세(盛世)에 있어서는 안 될 재변입니다. 관상감의 일은 정승이 맡아 다스리니 중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없는데, 그 일을 중하게 여겨서 유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종조(世宗朝)는 치도(治道)가 지극히 갖추어졌는데, 간의대(簡儀臺) 같은 것을 다 그때에 세운 까닭은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삼가는 도리가 지극히 크고도 급하기 때문이었으니, 이제 대신(大臣)을 가려서 특별히 가르쳐야 합니다. 신과 김안국(金安國)이 보루각(報漏閣)과 흠경각(欽敬閣)의 교정(校正)을 맡았으나 아직도 미치지 못하고, 누각(漏刻)도 혹 어긋나는 것은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니니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문의 일은 지극히 크다. 관상감의 관원이 무슨 아는 것이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잘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미 젊은 문신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였다.”


[간의대 축조 및 역사]

■ 간의대 축조시기1

세종 15(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 721(임신)

自古帝王 皆重曆象 堯命羲、和 允釐百工 舜在璣衡 以齊七政 予命製簡儀 於慶會樓北垣墻之內 築臺設簡儀 欲構屋于司僕門內 使書雲觀入直看候, 如何 喜等曰 構四五楹爲便

예로부터 제왕은 다 역상(曆象)을 중하게 여기어서, (堯)임금은 희씨(羲氏)·화씨(和氏)에게 명하여 백공(百工)을 다스리었고, (舜)임금은 선기옥형(璿璣玉衡)에 의거하여 칠정(七政)을 고르게 하였는지라, 내가 간의(簡儀) 만드는 것을 명하여 경회루 북쪽 담안에다가 대(臺)를 쌓고 간의를 설치하게 하였는데, 사복시(司僕寺) 문안에다가 집을 짓고 서운관에서 번들어 숙직하면서 기상을 관측하게 함이 어떻겠는가.”하니, 희 등이 아뢰기를, “너덧 간 집을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 간의대 축조시기2

세종 15(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 811(신묘)

大提學鄭招、知中樞院使(事)李蕆、提學鄭麟趾、應敎金鑌等 進渾天儀 上覽之 遂命世子 與李蕆質問制度, 世子入啓 世子至簡儀臺 與鄭招、李蕆、鄭麟趾、金鑌等 講問簡儀與渾天儀之制 乃命鑌及中官崔濕 夜直簡儀 參驗日月星辰 考其得失 仍賜衣于鑌 以其夜直也 自是上與世子 每日至簡儀臺 與鄭招等同議 定其制度

대제학정초·지중추원사이천(李蕆)·제학정인지·응교김빈(金鑌) 등이 혼천의(渾天儀)를 올리매, 임금이 그것을 곧 세자에게 명하여 이천과 더불어 그 제도를 질문하고 세자가 들어와 아뢰라고 하니, 세자가 간의대(簡儀臺)에 이르러 정초·이천·정인지·김빈 등으로 더불어 간의와 혼천의의 제도를 강문(講問)하고, 이에 김빈과 내시 최습(崔濕)에게 명하여 밤에 간의대에 숙직하면서 해와 달과 별들을 참고해 실험하여 그 잘되고 잘못된 점을 상고하게 하고, 인하여 빈에게 옷을 하사하니 밤에 숙직하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임금과 세자가 매일 간의대에 이르러서 정초 등과 함께 그 제도를 의논해 정하였다.


■ 간의대 축조시기2

세종 17(1435 을묘 / 명 선덕(宣德) 10) 98(병자)

頒賜丹木于宗親、駙馬、三議政、六承旨、集賢殿官、簡儀臺官有差

종친(宗親)·부마(駙馬)·세 의정(議政)·여섯 승지(承旨)·집현전 관원·간의대(簡儀臺) 관원에게 단목(丹木)을 차별이 있게 나누어 내려 주었다.


■ 간의대 근무에 김담 추천

세종 18(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 1226(정해)

上謂承政院曰 奉常判官李純之常仕簡儀臺 測候天文 今丁母喪 僉擧可代純之者 若無代者 則予當起復任之 且予嘗以謂非關係大體之人 則不令起復 今予之致意於簡儀者至矣 簡儀 非小事也 承政院僉擧集賢殿正字金淡 年少聰敏穎悟可任人也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봉상 판관(奉常判官) 이순지(李純之)가 상시로 간의대(簡儀臺)에 근무하여 천문을 측후했는데, 지금 어머니 상사(喪事)를 만났으니, 여러 사람이 이순지를 대신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라. 만약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나는 마땅히 그 사람을 기복(起復)시켜 임명할 것이다. 내가 일찍이 생각하기는 대체(大體)에 관계되는 사람이 아니면 기복시키지 않으려고 했으나, 지금 내가 간의(簡儀)에 뜻을 두는 것이 지극하니, 간의가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하였다. 승정원에서 여러 사람은 집현전 정자(正字) 김담(金淡)이 나이가 젊고 총명 민첩하며 영오(穎悟)하므로 맡길 만한 사람이라고 천거하였다.


■ 간의대 이전 논의1

세종 24(1442 임술 / 명 정통(正統) 7) 1226(임자)

召繕工提調朴從愚、李思儉及星原君李正寧, 議營別宮于後苑, 仍命相基于簡儀臺之東, 遂移臺於其北

선공 제조(繕工提調) 박종우(朴從愚)·이사검(李思儉)과 성원군(星原君)·이정녕(李正寧)을 불러 별궁(別宮)을 후원(後苑)에 짓기를 의논하고는, 이내 명하여 간의대(簡儀臺)의 동쪽에 집터를 보게 하고, 마침내 간의대를 그 북쪽에 옮기게 하였다.


■ 간의대 이전 논의2

세종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13(기미)

上命趙瑞康、成奉祖 率術者更相營宮之地于簡儀臺舊基 仍謂曰 時方多事 民未小康 又興工役 予豈樂爲哉 慕華館 乃迎詔勑之所 慶會樓 乃集君臣之處 繼祖宗之志而新之 多用民力 至今悔之 又簡儀臺 期傳於子孫萬世 今遽毁之 心甚難焉 然人君傳位嗣子 不可與嗣王同居一宮 且或父旣薨而母在 嗣王安能侍居一宮乎 爲此欲構此宮 第其地卑下 不稱予意 其更相之

임금이 조서강(趙瑞康)과 성봉조(成奉祖)에게 명하여 지술(地術)하는 사람을 거느리고 다시 궁(宮)을 영조(營造)할 자리를 간의대(簡儀臺) 옛터에다 가리게 하고, 인하여 이르기를, “때가 바야흐로 일이 많고 백성이 편안하지도 못한데, 또 공사를 일으키는 것을 내 어찌 즐겨서 할 것이랴마는, 모화관(慕華館)은 중국 칙서를 맞이하는 곳이요, 경회루(慶會樓)는 임금과 신하의 집회하는 곳이어서 조종(祖宗)의 뜻을 이어받아 새롭게 하느라고 민력을 많이 썼으므로, 이제 이르러 후회가 된다. 또 간의대(簡儀臺)는 자손 만대에 전하기를 기약했던 것인데, 이제 갑자기 헐어 버리려 하니 마음이 심히 괴롭다. 그러나 임금이 아들에게 자리를 전해 주고서 아들 임금[嗣王]과 더불어 같은 궁에 함께 거처하는 것은 불가하다. 또 부왕(父王)이 이미 돌아가고 어머니가 계실 때 아들 임금이 어떻게 한 궁에서 모시고 있을 것이냐. 이 때문에 이궁을 지으려 하는데 마침 그 지형이 낮아서 내 마음에 맞지 아니하니, 다시 땅을 살펴보라.”하였다.


■ 간의대 이전 논의3

세종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114(경오)

右獻納尹士昀啓 今毁簡儀臺 欲建後宮 臣等雖未知其緩急 然豈有不得已之事乎 乞停是役 上曰 此臺建於慶會樓 不可使中國使臣見之 予素有移築之計 且衍禧宮、樂天亭、皆已隔遠 予臨御此宮 已十六年矣 昌德宮尙遠 不無弊焉 予爲子孫萬世計 故欲營是宮耳

좌헌납(左獻納)윤사윤(尹士昀)이 아뢰기를, “이제 간의대(簡儀臺)를 헐고 후궁(後宮)을 세우시려 하심에, 신 등은 비록 그 완급(緩急)은 알지 못하오나 어찌 마지못해 하는 일이 있사오리까. 이 역사를 정지하시기를 비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간의대가 경회루에 세워져 있어 중국 사신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불가하므로, 내 본래부터 옮겨 지으려 하였고, 또 연희궁(衍禧宮)과 낙천정(樂天亭)이 모두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 이 궁에 있은 지가 16년이나 되었는데, 창덕궁도 오히려 멀어져 폐가 없지 않으므로, 내 자손 만세를 위한 계략으로 이 궁을 지으려 하는 것이다.”하였다.


■ 간의대 이전 축조1

세종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24(경인)

庚寅命都承旨趙瑞康等 相簡儀臺改築之地

도승지(都承旨)조서강(趙瑞康) 등에게 명하여 간의대(簡儀臺)를 고쳐 지을 자리를 고르라 하였다.


■ 간의대 이전 축조2

세종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78(신유)

仍謂承政院曰 今請罷營繕 然予有宿疾 退居之處 不可不營 若此役 亦以謂未便 則其停罷不難矣 且簡儀臺 雖云役民 然旣已成之 大君之第 亦旣告訖 雖有未成之第 然後日隨宜營造 何必今日畢營乎 各司年老吏典去官 似乎可矣 然冒年去官 以受刑罰 反興怨咨 亦未可行也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이제 영선(營繕)하는 것을 혁파하자 하였는데, 내가 숙질(宿疾)이 있으므로 물러가 거처할 곳을 불가불 경영하여야 하겠다. 만약 이 역사도 역시 불편하다고 한다면, 이를 정지하고 혁파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으나, 간의대(簡儀臺)는 비록 백성을 역사시키는 것이나, 이미 거의 성취되었고, 대군(大君)의 집은 역시 이미 준공되었으며, 비록 완성되지 아니한 집이 있으나, 후일에 형편에 따라서 영조할 것이니, 하필 오늘에 영조를 끝내야 하겠는가. 각사(各司)의 연로(年老)한 이전(吏典)의 거관(去官)은 가할 듯하지만, 나이를 속이고 거관(去官)하다가 형벌을 받으면 도리어 원한을 일으킬 것이니, 역시 실행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 문종의 간의대에서의 관측

문종 1(1451 신미 / 명 경태(景泰) 2) 515(임자)

命書雲觀 測日影于簡儀臺及惠政橋貞善坊仰釜儀 以夏至也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간의대(簡儀臺) 및 혜정교(惠政橋)·정선방(貞善坊)의 앙부의(仰釜儀)에서 해의 그림자를 측량하게 하였다. 하지(夏至)이기 때문이었다.


■ 단종대의 간의대 축조기사

단종 1(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 913(병인)

自古帝王作興 必先相方測景 築都城建宮闕 以遺子孫 子孫必世守而代居之 未聞繼序而遽棄之也 景福宮 我太祖開基創造之地 爲子孫萬世計者也 太宗踐祚 雖時御昌德宮 而凡大禮儀必於是焉行之 其深謀遠慮 至矣 逮于世宗 左建文昭殿右設簡儀臺 以爲悠久之計 雖或因事暫遷 而旋卽還宮 略不動搖 文宗繼統 旣卒哭 入御如舊 是豈不以舊宮爲子孫之世守 不可一日離也哉 今因術士之言 車駕屢移 或東或西 靡有底定 不獨人情洶洶 祖宗在天之靈 恐未妥寧

예로부터 제왕이 역사(役事)를 일으키면 반드시 먼저 방위(方位)를 살피고 경관(景觀)을 헤아려서 도성(都城)을 쌓고 궁궐을 세워서 자손에게 물려 주면 자손은 반드시 대대로 지켜서 이어 사는 것이지, 차례를 이은 이로서 갑자기 이를 버리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경복궁은 우리 태조(太祖)께서 개기(開基)하여 창조한 땅인데 자손 만세(萬世)를 위하여 계획한 것입니다. 태종께서 즉위(卽位)하여 비록 때로는 창덕궁에 납시었으나, 모든 큰 예의(禮儀)는 반드시 여기에서 행하였으니, 그 심모 원려(深謀遠慮)가 지극하였습니다. 세종께 이르러서는 왼쪽에 문소전(文昭殿)을 세우고 오른쪽에 간의대(簡儀臺)를 세워서 유구(悠久)한 계획을 하여, 비록 일로 인하여 잠시 옮겼을지라도 즉시 환궁(還宮)하셨고 조금도 동요되지 아니하였습니다. 문종께서 왕위를 이어 졸곡(卒哭)을 마치자 예전처럼 들어가 사셨으니, 이것이 어찌 구궁(舊宮)을 자손이 대대로 지켜서 하루라도 떠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술사(術士)의 말로 인하여 거가(車鴐)를 여러 번 옮겨서 혹은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정한 바가 있지 아니하여 인심(人心)이 흉흉한 뿐만 아니라 조종(祖宗) 의 하늘에 계시는 영혼이 편하지 못하실까 두렵습니다.


■ 김조의 졸기: 간의대 근무

세조 1(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 1011(계축)

癸丑/中樞院使金銚卒 銚初名鑌 字子和 世宗賜今名 號拙齋 金海府人也 爲人端介無華 廉平簡直 少好書史 不營産業 學問高邃 尤精於曆算 登第補藝文檢閱 中重試 累官至仁同縣監 秩未滿補集賢殿修撰 歷直提學 參掌簡儀臺 自擊漏製造 世宗寵遇日隆 擢承旨 後拜禮曹判書 每除一官 則必北向稽首曰 一介寒儒 濫蒙主知 位至宰輔 聖恩罔極 無由上報 至或流涕 性至孝 廬父母墳三年 每遇忌日 輒悲哀切至 常恨父早歿 事叔父酢如父 視酢之子如母弟 妻兄監察朴居善 生數女而歿 女皆在室 悉備資粧嫁之 然性頗隘 嘗中風甚苦 上遣內醫齎藥餌往救 訃聞 賜賻米豆竝三十石紙一百卷油芚四部棺槨 諡恭簡 執事堅固恭 平易不懈簡 有子二 輿輪

중추원 사(中樞院使) 김조(金銚)가 졸(卒)하였다. 김조의 초명(初名)은 빈(鑌)이었으며, (字)는 자화(子和)인데, 세종(世宗)이 지금의 이름을 내려 주었고, (號)는 졸재(拙齋)이며, 김해부(金海府) 사람이다. 사람됨이 단정(端正) 검소하여 화려함이 없었으며, 청렴 공평하고 정직(正直)하였다. 젊어서 서사(書史)를 좋아하고 산업(産業)을 영위하지 않았으며, 학문이 높고도 깊었는데, 더욱이 역산(曆算)에 정통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보임되었다가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서 인동 현감(仁同縣監)이 되어 임기가 차기 전에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으로 전보(轉補)되었다.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간의대(簡儀臺)에 참여하는 일을 관장하여 자격루(自擊漏)525) 를 제조하여 세종(世宗)의 사랑하심이 날로 높아갔으며, 승지(承旨)에 발탁되고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매양 한 관직이 제수되면 반드시 북향하여 계수(稽首)하고 말하기를, “한낱 한미한 유생(儒生)이 외람되게도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벼슬이 재보(宰輔)에 이르니, 성은(聖恩)이 망극하여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하고, 혹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의 분묘(墳墓)에서 3년간 여묘(廬墓)살이하였으며 매양 기일(忌日)을 만나면 그 비애(悲哀)가 극진하였다. 항상 아버지가 일찍 죽은 것을 한탄하면서 숙부 김작(金酢)을 섬기기를 아버지같이 하였고, 김작의아들을 대하기를 마치 한 어머니에서 태어난 아우처럼 하였다. 처형(妻兄)인 감찰(監察) 박거선(朴居善)이 딸 몇을 낳고 죽었는데, 그 딸들이 모두 그 집에 있었으며 다 자장(資粧)을 갖추어서 시집보냈다. 그러나 성질이 자못 편협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중풍(中風)에 걸려 몹시 고통을 받았는데, 임금이 내의(內醫)526) 를 보내어 약이(藥餌)를 싸 가지고 가서 구료(救療)하게도 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임금이 미·(米豆)를 아울러 30(石), 종이 1백 권(卷), 유둔(油芚) 4(部)와 관곽(棺槨)을 부물(賻物)로 하사하였다. 시호(諡號)를 공간(恭簡)이라 하였으니, 일을 잡기를 견고하게 하는 것을 공(恭)이라 하고, 평이(平易)하면서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간(簡)이라 이른다. 아들 둘이 있으니, 김여(金輿)와 김윤(金輪)이다.


■ 간의대와 간경대

세조 3(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 316(기묘)

書雲觀啓前此本觀築看更臺每更一人觀望今臺毁坐平地不得觀望四方請依世宗朝例就簡儀臺候察 從之

서운관(書雲觀)에서 아뢰기를, “이보다 먼저 본관(本觀)에서 간경대(看更臺)를 건축(建築)하고는 매양 한 사람을 번갈아 관망(觀望)하도록 했는데, 지금 간경대(看更臺)가 무너져 평지(平地)에 앉아서는 사방을 관망(觀望)할 수가 없으니, 청컨대 세종조(世宗朝)의 예(例)에 의거하여 간의대(簡儀臺)에 나아가서 살펴보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자의 간의대에서의 천문교육

세조 3(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 1124(갑신)

乙亥閏六月乙卯 殿下卽位 群臣請早建世子用端國本 於是撰日備儀 冊爲王世子 遣使請命于朝 帝諭曰 王尙敎以忠孝 以副國人之望 初世子入受冊命訖 卽朝于王妃退 又受百官賀 終始益虔 群臣相慶曰 我朝鮮萬世之福也 殿下選置師傅賓客及書筵官 以盡敎養之方 世子亦樂學不倦 引書筵官講說者日三焉 嘗讀書至舜典璣衡註 其制度有難以文字解者 卽與書筵官登簡儀臺 觀渾天儀 以與書之所載反復參證 無所滯礙 他凡讀書皆然 疑則必問 問則必審 殿下嘗以 兵陣家業也不可不知 親授黃石公等書 服膺聖訓 造次不違 故學日進以就高明 殿下嘗謁齊陵 因以大蒐 命世子居守 授以符節使專裁決 事皆得宜

을해년 윤6월 을묘에 전하께서 즉위하시니, 군신들이 일찍 세자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도록 청하였다. 이에 날을 택하여 의식을 갖추어서 왕세자로 책봉(冊封)하고, 사신을 중국 조정에 보내어 책명(冊命)을 청하였다. 명나라 황제가 유시(諭示)하기를, ‘왕은 충효로써 가르쳐 국민의 기대에 부응(副應)하도록 하오’. 하였다. 처음에 세자가 들어가 책명(冊命)을 받고 나서 즉시 왕비께 조현(朝見)하고, 물러나와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는데 시종 경건(敬虔)하게 하니, 여러 신하들이 서로 경하(慶賀)하여 이르기를, ‘우리 조선 만세의 복이라.’고 하였다. 전하께서 사부(師傅)·빈객(賓客)과 서연관을 선임하여 교양하는 법을 다하시고, 세자 또한 학업을 즐기고 게으름이 없었으며 하루 세 번씩 서연관을 불러 강론하였다. 일찍이 서경(書經)》을 읽다가 순전(舜典)》《기형주(璣衡註)》에 이르러 그 제도가 문자만으로는 해득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즉시 서연관과 더불어 간의대(簡儀臺)에 올라가 혼천의(渾天儀)를 관찰하고, 《서경에 실린 바와 더불어 참고하고 증험(證驗)하여 애체(礙滯)함이 없었다. 다른 모든 글을 읽을 때에도 다 그러하였으니, 의심이 나면 반드시 묻고, 물으면 반드시 살피었다. 전하께서 일찍이 병진(兵陣)은 우리 가업이니, 알지 않으면 안된다.’ 하고, 친히 황석공(黃石公) 등의 서적을 주니, 성훈(聖訓) 을 가슴속에 간직해 조금도 이를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학업이 날로 진취하여 고명(高明)한 경지에 이르렀다. 전하께서 일찍이 제릉(齊陵) 을 알현하고 인하여 대수(大蒐) 를 하였는데, 세자에게 명하여 도성에남아 지키게 하고 부절(符節)을 주어 일을 전결(專決)하게 하였더니, 일이 모두 합당하였다.


■ 간의대터 세자궁 건설중지

세조 8(1462 임오 / 명 천순(天順) 6) 223(무자)

初 壞簡儀臺 建世子宮 上以諸處功役竝擧 命停之

처음에 간의대(簡儀臺)를 부수고 세자궁(世子宮)을 세우려 하였는데, 임금이 여러 곳에서 공역(功役)을 모두 일으킨다고 하여 명하여 이를 정지시켰다.


■ 간의대터 세자궁 건설논의1

세조 8(1462 임오 / 명 천순(天順) 6) 413(무인)

傳曰 予意以爲建春門內所儲材木 毁簡儀之石 猶足構世子宮 今請伐石 是何意歟 河城尉年少 不知事體者 但傳命而已 是必金漑等務以侈美爲能 若此其煩耳 茅茨土階萬世稱美 雖以瓦礫支柱可矣 其召當該官員 詰問煩請之因 且儒生必知故事 其改選文臣以啓

전교하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건춘문(建春門) 안에 쌓아 둔 재목(材木)과 간의대(簡儀臺)의 돌을 헐으면 오히려 세자궁(世子宮)을 짓기에 족할 터인데, 이제 벌석(伐石)하기를 청하니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성위(河城尉)는 연소(年少)하여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는 자이니 다만 오로지 명(命)하였을 뿐이고, 이것은 필시 김개(金漑) 등이 사치하고 아름답게 하는데 힘쓰는 것을 능사로 여겨 이와 같이 번거롭게 하였을 것이다, 띠풀로 지붕을 잇고 흙으로 뜰을 쌓아도 만세토록 아름답다고 일컬을 것이어늘, 비록 기와로 지붕을잇고 자갈로 기둥을 만드는 것이 옳겠느냐? 그 해당 관원(官員)을 불러 번거롭게 청한 원인을 힐문(詰問)하고, 또 유생(儒生)은 반드시 고사(故事)를 알아야 하니 그 문신(文臣)을 개선(改選)하여 아뢰라.”하였다.


■ 간의대에서의 혜성관측

세조 14(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 94(경신)

庚申/彗星見 命都承旨權瑊及安孝禮候之 瑊等登簡儀臺以望 夜三皷 西南忽有黑氣 且有聲如萬馬群奔 俄而雷電以雨 雨止 瑊等復登以觀 彗星光芒如前

혜성(彗星)이 나타났으므로 도승지(都承旨) 권감(權瑊)과 안효례(安孝例)에게 명(命)하여 이를 살피게 하여, 권감 등이 간의대(簡儀臺)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밤 3(三鼓)에 서남(西南)쪽에 홀연히 검은 기운이 있었고, 또 만마리의 말이 떼를 지어 달리는 것과 같은 소리가 있었으며, 조금 있다가 우레와 번개가 치고, 비가 오다가 그쳤는데, 권감 등이 다시 올라가 보니, 혜성의 광망(光芒)은 전과 같았다.


■ 간의대와 규표크기 설명

성종 6(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 1013(기축)

禮曹兼判書尹子雲繕工監提調金漑李崇元來啓曰 臣等往審古東宮 間閣有餘 且有御室 懿廟移御甚合 但簡儀臺峙其北 臨壓正殿 然北墻加築數仞 則但見圭標腰上耳 傳曰 予當親審

예조 겸판서(禮曹兼判書) 윤자운(尹子雲),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 김개(金漑)·이숭원(李崇元)이 와서 아뢰기를, “신 등이 옛 동궁(東宮)을 가서 살피었더니, 간각(間閣)이 유여(有餘)하고 또 어실(御室)이 있어 의묘(懿廟)를 이어(移御)함에 매우 합당합니다마는, 다만 간의대(簡儀臺)가 그 북쪽으로 대치하여, 그 정전(正殿)을 임압(臨壓)하였습니다. 그러나 북쪽 담장을 두어 길만 더 쌓는다면, 규표(圭標)의 허리 위[腰上]만이 보일 뿐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 마땅히 친히 살피겠다.” 하였다.


■ 간의대터 세자궁 건설논의2

성종 6(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 1015(신묘)

幸景福宮古世子宮 親審作新殿便否 傳于院相曰 卿等所見何如 院相等啓曰 甚當 但北墻加築數仞 則簡儀臺亦不見也 遂御內殿 命饋隨駕宗宰于慶會樓下 傳曰 人言此樓壯麗者非一 以予所見 不爲壯麗也 院相等啓曰 以石爲柱 牢實而已 餘因舊址 有何壯麗 仍啓曰 古世子宮 甚合作新殿 傳曰 予亦以爲甚當也 卽命以古世子宮爲延恩殿 及還宮 懿旨饋扈從宗宰

경복궁(景福宮)의 옛 세자궁(世子宮)에 거둥하여 친히 신전(新殿)을 짓기에 편한 여부를 살피고, 원상(院相)에게 전교하기를, “(卿) 등의 소견(所見)은 어떠한가?” 하니, 원상(院相) 등이 아뢰기를, “매우 마땅합니다만, 북쪽 담을 몇 길 더 쌓는다면, 간의대(簡儀臺)도 또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드디어 내전(內殿)에 나아가 명하여 수가(隨駕)한 종친(宗親)·재추(宰樞)를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대접하게 하고, 전교하기를, “사람들이 이 누각[樓]을 장려(壯麗)하다고 말하는 자가 하나만이 아니지만, 내 소견으로는 장려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니, 원상(院相) 등이 아뢰기를, “돌로써 기둥[柱]을 하여 견실할 따름이지, 나머지는 옛 터를 말미암았으니, 어찌 장려함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옛 세자궁(世子宮)은 신전(新殿)을 짓는 데 매우 합당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 또한 매우 마땅하다고 생각된다.”하고, 즉시 명하여 옛 세자궁을 연은전(延恩殿)이라 하고, 환궁(還宮)하자, 의지(懿旨)로 호종(扈從)한 종친·재추를 대접하게 하였다.


■ 세종대의 간의대사업 소개

성종 10(1479 기해 / 명 성화(成化) 15) 1115(병신)

丙申/御經筵 講訖 同知事李坡啓曰書云 欽若()旻天 敬授人時 我世宗 設簡儀臺渾天儀日影臺欽敬閣自擊漏 其制度極備 臣近聞漏聲 夜前則疏 夜後則數 一夜之間 豈天時有異 是必掌漏之人 失其職也 不然恐歲久 而有差 請召觀象監官員 詳問其由 上曰 可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講)하기를 마치자, 동지사(同知事) 이파(李坡)가 아뢰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하늘을 공경하고 순종하여 인시(人時)를 삼가 알려준다.’고 했는데, 우리 세종(世宗)께서 간의대(簡儀臺)·혼천의(渾天儀)·일영대(日影臺)·흠경각(欽敬閣)·자격루(自擊漏)를 설치하여 그 제도가 지극히 구비되었습니다. 그런데 신(臣)이 근일에 듣건대, 물시계의 물 소리가 야전(夜前)에는 드물다가 야후(夜後)에는 잦다고 하니, 하룻밤 사이에 어찌 천시(天時)가 다름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물시계를 맡은 사람이 그 직무를 그릇되게 하였거나, 그렇지 않다면 햇수가 오래되어 차이가 생긴 것이니, 청컨대 관상감(觀象監)의 관원을 불러서 그 이유를 상세히 묻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하였다.


■ 간의청 내용

성종 25(1494 갑인 / 명 홍치(弘治) 7) 825(신사)

大命近止 已致靡有孑遺之漸 此誠百職不擧 八蜡不通 汲汲於救荒之政之時也 今日復諸君駙馬第役 明日復濟川亨役 呻吟之聲 雜以呼邪 凡有識者 所不忍見 以聖上如傷之心 其忍聞之耶 旣復綱目簡儀之廳 又遣點馬于諸道 綱目簡儀 非今日急務 點馬則擾民不貲 此亦在所不得已乎

천명[大命]이 가까이 이르러 살아 남을 자가 없는 조짐을 불러 왔는데, 이는 진실로 백직(百職)이 거양(擧揚)되지 못하고, 팔사(八蜡)가 불통(不通)한 것이니, 구황(救荒)의 정치에 급급(汲汲)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도 오늘은 여러 군(君)과 부마(駙馬)의 제택(第宅)을 짓는 역사(役事)를 회복시키고, 명일에는 제천정(濟川亭)의 역사를 회복시켜서 신음(呻吟)하는 소리에 영차 소리가 어우러지니, 무릇 식견(識見) 있는 자가 차마 보지 못하는 바인데, 성상(聖上)의 마치 다친 것같이 보는 마음으로 차마 이를 들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미 강목청(綱目廳)과 간의청(簡儀廳)을 회복시켰고, 또 여러 도(道)에 점마(點馬)를 보내셨습니다. 《통감강목과 간의 만드는 것이 오늘의 급무(急務)가 아니고, 점마는 백성을 소요(騷擾)시키는 바가 한이 없는데, 이 또한 부득이(不得已)한 바가 있는 것입니까?


仍召世明等敎之曰 諸君駙馬營第所役者 只番上正兵彭排隊卒與工匠耳 番上正兵 雖險年 不可退而備荒 彭排隊卒亦有月俸 工匠 雖不役于公處 必自役于私處 以食其力也 濟川亭 非遊觀之所 簡儀廳 政丞監其事 綱目廳 宰相掌其事 事且垂畢 故爲之耳 若果勞民傷財 則政丞宰相 何不言之 而爾等言之如此耶

성세명(成世明) 등을 불러 전교(傳敎)하기를,“여러 군(君)과 부마(駙馬)의 제택(第宅)을 영건(營建)하는 데 역사(役使)시키는 자는 단지 번상(番上)한 정병(正兵)과 팽배(彭排)·대졸(隊卒) 및 공장(工匠)뿐이다. 번상한 정병은 비록 흉년이라 하더라도 물러가서 흉년에 대비할 수 없고, 팽배·대졸은 또한 월봉(月俸)이 있으며, 공장은 비록 공처(公處)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스스로 사처(私處)에서 일하여서 노력(勞力)으로써 먹고 살게 마련이다. 제천정(濟川亭)은 유관(遊觀)하는 곳이 아니고, 간의청(簡儀廳)은 정승(政丞)이 그 일을 감독하고, 강목청(綱目廳)은 재상(宰相)이 그 일을 관장하는데, 일이 또 거의 끝마치게 된 까닭에, 이를 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과연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손상시킨다면 정승과 재상이 어찌 말하지 않고, 그대들이 이처럼 말하겠는가?


■ 간의대 관측내용 검토관련

연산 3(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 812(신사)

辛巳御經筵 獻納孫仲暾曰 古云 念終始典于學 厥德修罔覺 近日勤御經筵 臣等不勝忻忭 觀史而知歷代興亡之迹 至於性理之學如中庸大學 尤不可不講 晝夕講夜對 亦請御之 且三年之間 獄囚多滯 請須視事 司經姜澂曰 大學衍義前所進講 今則日候凄涼 於晝進講可也 王曰 日氣尙熱 且畢修寶敬堂 則朝啓可受也 檢討官李㙉曰 天變重大 故古者日食星孛 無不書之 今國家設簡儀臺 令日官輪次坐更 以觀星度 而日官慢不致意 翌日所進單子與外觀象監單子 先自相准 使不差誤 甚不可 王曰 自有內外觀象監矣

왕이 경연에 납시니, 헌납 손중돈(孫仲暾)이 아뢰기를, “옛말에 이르되, 생각을 종시 학문에 두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 덕이 닦아진다고 했습니다. 전하께서 근일에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니 신 등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사서를 보아서 역대의 흥하고 망한 자취를 알으소서. 성리학(性理學)에 있어서도 중용(中庸)》대학(大學)》 같은 책은 더욱 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주강(晝講)·석강(夕講)·야대(夜對)에도 납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3년 간이나 옥수(獄囚)가 많이 적체되었으니, 청하옵건대 시사(視事)를 하옵소서.” 하고, 사경(司經) 강징(姜澂)은 아뢰기를, “지난번 진강(進講)하던 대학연의(大學衍義)》는 지금 일기가 서늘하니 낮에 진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일기가 아직도 덥고, 또 보경당(寶經堂)도 다 수리되었으니 조계(朝啓)에 진강을 받겠노라.” 하였다. 검토관 이전(李㙉)이 아뢰기를, “천변(天變)은 중대한 일이므로 옛날에는 일식(日食)과 성불(星孛)을 모두 서책에 썼습니다. 지금 국가에서 간의대(簡儀臺)를 신설하고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경(更)마다 윤번제로 바꾸어 앉아서 별의 도수를 보게 하였는데, 일관이 등한하여 성의를 다하지 않아서 다음날 진상표 단자(單子)를 외관상감(外觀象監) 단자와 먼저 서로 준(准)해서 착오되지 않게 하니 매우 불가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외관상감(內外觀象監)이 있다.” 하였다.


■ 간의대 철거관련

연산 11(1505 을축 / 명 홍치(弘治) 18) 1124(을사)

命移報漏閣于昌德宮 撤簡儀臺

명하여, 보루각(報漏閣)을 창덕궁(昌德宮)에 옮기고, 간의대(簡儀臺)는 뜯어버렸다.


■ 간의대 수리의 당위성

중종 9(1514 갑술 / 명 정덕(正德) 9) 520(임오)

政院啓曰 臺諫辭職 未有如此之久也 旱災必有所召 臺諫廢事已久 下民冤枉必多 須速決斷 使之就職 且簡儀臺修理 伐木運石 呼耶之聲 動於闕內 恐未安於謹災也 傳曰 無咎大臣 不可輕遞 故每敎臺諫 使之就職矣 簡儀臺修理 果不急也 其停之

정원이 아뢰기를, “대간이 이렇게 오래 사직한 적이 없습니다. 한재(旱災)는 반드시 원인이 있는 것이며, 대간이 일을 폐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백성들의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모름지기 속히 결단하여 취직하게 하소서. 또 간의대(簡儀臺)를 수리하는데 나무를 베고 돌을 운반하느라고 외치는 소리가 대궐 안에서 진동하니, 재앙을 삼가는 데 미안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허물 없는 대신들을 경솔히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매양 대간(臺諫)에 분부하여 취직하도록 했던 것이요, 간의대를 수리하는 것은 과연 급한 일이 아니니 중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 간의대 수리 기사

중종 12(1517 정축 / 명 정덕(正德) 12) 1125(정유)

世昌曰 周時築靈臺 仰觀天文 俯察妖祲 其敬天謹災之道 至矣 我國觀象監之設 蓋爲此也 而其所事 至爲疎緩 大違本意 觀象監官員 能知五星之纏度者 鮮矣 何敢望仰觀天文 以察人事乎 近日木星犯太微 月又犯太微 此皆盛世不宜有之災變也 觀象監事 政丞領之 不爲不重 而未有重其事而留意者 世宗朝 治道至備 如簡儀臺之類 皆創於其時 以敬天謹災之道 至大且急故也 今可揀選文臣 別用敎之也 臣與金安國 當校正報漏閣與欽敬閣 而時未及焉 漏刻亦或差違 誠非細故 願須留念 上曰 天文事至大 觀象監官員有何所知 亦何能爲之 故已令年少文臣肄習矣

성세창이 아뢰기를, “(周)나라 때에는 영대(靈臺)를 쌓아 천문(天文)을 우러러보고 재앙을 굽어살폈으니,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삼가는 도리가 지극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 관상감(觀象監)을 설치한 까닭은 이를 위해서일 터인데, 하는 일이 지극히 소완(疏緩)하여 크게 본의에 어그러지며, 관상감의 관원 중에는 오성(五星)이 운행하는 도수를 잘 아는 자가 드무니, 어떻게 감히 천문을 우러러보아 인사(人事)를 살피겠습니까? 근일 목성(木星)이 태미원을 범하고 달이 또 태미원을 범하였는데, 이것은 다 성세(盛世)에 있어서는 안 될 재변입니다. 관상감의 일은 정승이 맡아 다스리니 중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없는데, 그 일을 중하게 여겨서 유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종조(世宗朝)는 치도(治道)가 지극히 갖추어졌는데, 간의대(簡儀臺) 같은 것을 다 그때에 세운 까닭은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삼가는 도리가 지극히 크고도 급하기 때문이었으니, 이제 대신(大臣)을 가려서 특별히 가르쳐야 합니다. 신과 김안국(金安國)이 보루각(報漏閣)과 흠경각(欽敬閣)의 교정(校正)을 맡았으나 아직도 미치지 못하고, 누각(漏刻)도 혹 어긋나는 것은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니니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문의 일은 지극히 크다. 관상감의 관원이 무슨 아는 것이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잘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미 젊은 문신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였다.”


■ 간의대 관측기기의 교정관련

중종 14(1519 기묘 / 명 정덕(正德) 14) 77(무술)

侍讀官張玉曰 今以簡儀臺度數差移 見之 我朝樂制 必至大訛 其器之訛謬者 亦不可不正之也

시독관 장옥(張玉)이 아뢰기를, “지금 간의대(簡儀臺)의 도수가 틀리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 나라의 악제(樂制)가 반드시 크게 잘못되었을 것이니, 그 기구의 틀린 데를 또한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간의대 관련기사1

중종 14(1519 기묘 / 명 정덕(正德) 14) 1117(정미)

上曰 其時承旨等 皆往簡儀臺 何以知之 構曰 承旨等 果往簡儀臺矣 其時臣就獄 則光祖等相持痛哭曰 此必變起於中間也 曉聞引見大臣 皆酌酒相賀曰 此乃出於宸衷也 吾輩雖死 有何恨也 臣以爲遭我聖上 豈料有此暗昧之事乎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 승지들이 다 간의대(簡儀臺)에 갔었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하매, 이구가 아뢰기를, “승지들은 과연 간의대에 갔었습니다. 그때 신이 옥에 가니, 조광조 등이 서로 잡고 통곡하며 이는 중간에서 변이 일어난 것일 것이다.’ 하였는데, 아침에 대신을 인견(引見)하셨다는 말을 듣고서 다들 술을 나누며 서로 하례하기를 이것은 신충(宸衷)에서 나온 일이니, 우리들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 하였으나, 신은 생각하기를 우리 성상을 만나서 어찌 이런 어두운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었느냐.’ 하였습니다.”


■ 간의대 혜성관련 기사

중종 26(1531 신묘 / 명 가정(嘉靖) 10) 72(계축)

癸丑領議政鄭光弼左議政李荇右議政張順孫啓曰 前者未見之星 今始出見 此甚驚愕 上下所當戒懼 雖未知所以然 豈無應驗而然歟 臣等以三公 在職未安 請遞 傳曰 近來觀象監 果以彗星連日啓之 至爲駭愕 但彗星之變 前人議論 固爲不一 然災不虛生 上下以誠心 恐懼修省可也 如此則亦有消災之理矣 豈以此遞三公乎 勿辭 光弼領觀象監事獨啓曰 修省之事固當 測侯之事 亦不可不致其精也 前在成宗朝 値此彗星之變 於觀象監官員 擇其能解星變之人 又以文官金應箕趙之瑞等 遞入于簡儀臺 其消長移動之狀 無不測候 今者文臣 無解天文者 以觀象監官員 擇其稍解天文者 令入于簡儀臺 依舊例測侯何如 傳曰 依啓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이행, 우의정 장순손이 아뢰기를,“전에 보이지 않던 별이 지금 나타나니 이는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상하가 마땅히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비록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어찌 응험(應驗)도 없이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신들은 삼공(三公)으로서 직에 있기 미안합니다. 체직시켜 주소서.”하니, 전교하기를,“근래 관상감에서 과연 혜성 때문에 연일 아뢰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다만 혜성의 변고에 대하여는 옛사람들의 의논이 진실로 한결같지 않다. 그러나 재변은 공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니, 상하가 삼가는 마음가짐으로 성심을 다하여 매사에 유념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재변을 없애는 방법인 것이다. 어찌 이 때문에 삼공을 체직시킬 수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광필영관상감사(領觀象監事).】이 홀로 아뢰기를,“수성(修省)을 해야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고, 기상을 살피는 일도 또한 정밀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성종조 때에도 이러한 혜성의 변괴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관상감 관원 중에서 성변(星變)을 잘 아는 사람을 가려 뽑고, 또 문관 김응기(金應箕)와 조지서(趙之瑞) 등에게 교대로 간의대(簡儀臺)에 들어가서 혜성의 소장(消長)과 이동 상황을 철저히 살피게 하였습니다. 지금 문신 가운데는 천문을 아는 자가 없으니, 관상감 관원 가운데서 천문을 좀 아는 자를 가려 뽑아서 간의대에 들여 보내어 구례(舊例)대로 기상을 살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전교하였다.


■ 간의대 지지(地誌)》관련기사1

중종 32(1537 정유 / 명 가정(嘉靖) 16) 410(무오)

戊午傳于政院曰 前者以我國地誌 給天使之時 忙迫不得詳見矣 今乃見之 則簡儀臺亦竝書之 前則如測象天文等事 皆諱之也 今之所以幷書之者 何意耶 今已書給 雖問之 猶無益也 然於予意似異 故言于政院也

정원에 전교하였다. “지난번에 우리 나라 지지(地誌)》를 천사에게 줄 적에 매우 바빠서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이제야 보니 간의대(簡儀臺)도 아울러 적혀 있었다. 그전에는 기상(氣象) 관측과 천문(天文) 같은 것들은 모두 숨겼었는데 이번에 아울러 적어준 것은 무슨 뜻이었느냐? 이제는 이미 적어서 줬으므로 물어보아도 소용이 없는 일이나 이상하게 생각되어 정원에 말하는 것이다.”


■ 간의대 지지(地誌)》관련기사2

중종 32(1537 정유 / 명 가정(嘉靖) 16) 411(기미)

己未傳于政院曰 皇華集三十件印出事 曾已傳敎矣 今聞天使 欲得三十餘件云 加印二十件可也 且前見贈天使地誌 簡儀臺竝錄之 恐其有忌於天朝 故前者下問矣 果有忌乎 政院回啓曰 昨日 院以簡儀臺幷錄事 問于大臣 則左議政金安老曰 我國本稱文獻之邦也 如此觀天之事 雖有之 亦非僭禮也 有何忌乎 傳曰 知道

정원에 전교하기를, “《황화집(皇華集)》30건만 인출(印出)하라는 것을 앞서 이미 전교했었다. 지금 듣건대 천사가 30여 건을 얻고자 한다니 20건을 더 인출하도록 하라. 또 지난번에 천사에게 준 지지(地誌)》에 간의대(簡儀臺)도 아울러 기록되어 있었다. 천조(天朝)에 기휘(忌諱)해야 될 점이 있을까 염려되어 저번에 하문했었는데 과연 기휘할 점이 있던가?” 하였는데, 정원이 회계하기를, “어제 정원이 간의대를 아울러 수록(收錄)한 일을 가지고 대신들에게 물어보니, 좌의정 김안로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본래부터 문헌의 나라라고 해오고 있다 이 같은 천문(天文) 관찰하는 일은 하고 있더라도 참람한 짓이 아닌데 무슨 기휘될 점이 있겠느냐.’ 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간의대 지지(地誌)》관련기사3

중종 32(1537 정유 / 명 가정(嘉靖) 16) 416(갑자)

傳于政院曰 今見天使處所送地誌天使欲觀我國土地廣狹道里遠近山川之名風俗之美 有命書給 名曰 地誌如報漏閣欽敬閣簡儀臺等處 忌諱於中朝者非一 而具錄不遺 如經筵 言於中朝則曰 書筵 如太祖 稱於中朝則曰康獻大王 而今此直書不諱 何耶 天使獨自見其書而止則已矣 幸至於皇帝見之 則無乃不可乎 政院回啓曰 當初地誌撰集之時 蘇世讓閔齊仁金遂性鄭萬鍾申瑛等 同議爲之 今萬鐘以典翰 入直於弘文館 請卽招問何如 傳曰 如啓 政院啓曰 今以地誌事 問萬鍾 則當初撰集之時 以簡儀臺等事 蒙準于大提學金安老則曰 此非曆法 而乃爲觀天之器 雖有之 固無妨也云 故不諱而具錄 若經筵等事 皆諱而書之 唯入啓一件 則非上國人所見 故以實書啓云 傳曰 知道

정원에 전교하기를, “내가 지금 천사에게 보낼 지지(地誌)》를 보았더니천사가 우리 나라의 토지(土地)의 넓이, 도로의 거리, 산천(山川)의 이름, 풍속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하므로, 써서 주도록 명했는데, 이름을 지지라고 했었다.】 보루각(報漏閣)·흠경각(欽敬閣)·간의대(簡儀臺) 등과 같은 곳을 중조(中朝)에 기휘할 것이 한둘이 아닌데 갖추 기록하고 빼놓지 않았다. 경연(經筵) 같은 것도 중조에 말하기는 서연(書筵)이라 하고, 태조(太祖)를 강헌대왕(康獻大王)이라 하였는데, 지금 이런 것들을 그대로 쓰고 은휘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천사가 그 글을 혼자만 보고 만다면 그만이거니와 혹시라도 황제가 보게 된다면 안 되지 않겠는가.” 하니, 정원이 회계하기를, “당초에 지지를 편집할 적에 소세양·민제인·김수성·정만종(鄭萬鍾)·신영(申瑛) 등이 함께 의논해서 했었습니다. 지금 정만종이 전한(典翰)으로 홍문관에 입직(入直)하고 있으니 즉시 불러다 물어봄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방금 지지에 관한 일을 가지고 정만종에게 물으니 당초에 편집할 때 간의대 등의 일을 가지고 대제학 김안로에게 승락을 받았는데, 「이는 역법(曆法)에 관한 것이 아니고 곧 천문을 관찰하는 기구이므로 비록 있더라도 잘못될 것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은휘하지 않고서 갖추 기록했고, 경연과 같은 것들은 모두 은휘하고 썼으며, 오직 입계(入啓)한 한 건은 상국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실지대로 써서 입계했다.’고 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간의대 관련 상벌

중종 32(1537 정유 / 명 가정(嘉靖) 16) 126(신해)

萬鍾又以典獄署囚前觀象監副正金龜壽前爲觀象監久任時 簡儀臺汲水步兵三名 番價私用 罪絞待時推案進啓 上曰 金龜壽之子 今已三度上言矣 予詳察之 其曰事干者 乃觀象監奴子金同也 當初推問之時 其官員之事 似當抵死發明 至於不勝忍杖 然後乃服 而今只受二箇杖遽服 此情理所可疑 不可輕易論斷

정만종이 또 전옥서의 죄수 전 관상감 부정(觀象監副正) 김귀수(金龜壽) 【앞서 관상감의 구임(久任)이 되었을 적에 간의대(簡儀臺)의 물긷는 보병(步兵) 3명을 번가(番價)하게 하고 사사로이 부린 것으로 죄가 교대시였다.】의 추안을 진계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귀수의 아들이 세 번이나 상언(上言)하였는데, 내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사간(事干)은 바로 관상감의 노자(奴子)인 금동(金同)이다. 당초 추문할 때에는 그 관원(官員)의 일이 사죄에 저촉될 듯하여 발명(發明)을 하다가 곤장을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복을 하였었는데, 지금은 두 대의 곤장을 맞고 갑자기 자복하였다. 이것은 인정과 의리로 보아 의심스러운 것이니 경솔하게 논단(論斷)할 수 없겠다.” 하였다.


■ 간의대 위치 관련기사

중종 89, 34(1539 기해 / 명 가정(嘉靖) 18) 327(을미)

乙未傳于政院曰 簡儀臺 在延恩殿之後最高 而與後苑相近矣 龔吳天使見而問之 則對之之難蓋非侯邦之制故諱之矣 令繕工監 高其遮籬 使不得見可也

정원에 전교하였다. “간의대(簡儀臺)가 연은전(延恩殿) 뒤 가장 높은 곳에 있는데 후원에서 가깝다. ·오 천사가 보고 물었을 때에 대답하기가 곤란하였다.【대체로 제후 나라의 제도가 아니므로 숨기려는 것이다.】 선공감에게 막는 울타리를 높이 하여 안 보이게 하라고 하라.”


■ 간의대 규표 수리1

명종 1(1546 병오 / 명 가정(嘉靖) 25) 624(기유)

己酉/觀象監啓曰 簡儀臺圭表拆破處 今已補鑄 時方鍊正臺石 畢則將立 但舊制表柱中空處 實以油灰 今亦依舊制爲之 但表柱拆破傾側之由 則意必柱上擎樑兩龍及所附着頭甲 極爲斤重 三十餘人 僅能運轉 龍形又北向擎樑 北邊偏重而然也 圭石取影 不必體重 雙龍擎樑 然後爲之 雖以獨龍輕鑄 蟠據柱頭 直手向上擎樑 而使表柱 四面輕重均平 則不至傾側拆破 而第以先王舊制 難於輕改 故未敢爲之 今當仍舊制整竪 疑其不久而復至傾拆 故欲於狹石上柱表 以銅鐵作帶四五處束之 以備後患 圭柱修補改立 極爲重難 須窮思極慮 俾無差違 有士人河世濬 性本工巧 凡製造精巧 常時兩闕報漏日影等器及諸處觀天儀象 年久差誤 不免逐年隨改 若以如此之人 俾掌修治 則慮必精緻 不至易差 而觀象監無可屬之闕 未卽屬焉 請姑令假習讀稱號常仕何如 傳曰 如啓

관상감(觀象監)이 아뢰기를, “간의대(簡儀臺)의 규표(圭表)가 터진 곳은 지금 이미 보주(補鑄)하였고 이제 대석(臺石)을 연정(鍊正)하는 일만 끝나면 세울 것입니다. 다만 구제(舊制)는 표주(表柱) 가운데 빈 곳을 유회(油灰)로 채웠는데 지금도 구제를 따라서 해야 하나 표주가 터지고 기운 이유를 생각해 보니, 기둥 위에 대들보를 바친 두 마리의 용(龍)과 부착한 두갑(頭甲)이 매우 무거워 30여 명이 겨우 운반할 수 있는 정도이고 용의 형상도 북쪽을 향하여 들보를 바치고 있어 북변(北邊)에 무게가 치우쳐서 그러한 것입니다. 규석(圭石)은 그림자를 취하는 것이니 쌍룡이 들보를 받치도록 무겁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한 마리의 용을 가볍게 주조하여 기둥머리에 서려 있게 하고 손을 곧바로 하여 위를 향해 들보를 받쳐서 표주 사면의 경중을 고르게 하면 기울거나 터지지 않을 것이나 다만 선왕(先王)의 구제를 경솔하게 고칠 수 없으므로 감히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구제를 따라 세워야 하나 얼마 안 되어 다시 기울고 터질 것 같기에 협석(狹石)을 주표에 올려 놓고 구리철사로 만든 띠로 너댓 군데를 묶어서 후환을 대비하려 합니다. 규주를 보수하고 다시 세우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 깊이 생각하시어 잘못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사인(士人) 하세준(河世濬)은 본성이 공교하여 모든 제조가 정교합니다. 언제나 양궐(兩闕)의 보루(報漏)·일영(日影) 등의 기구와 여러 곳의 관천의상(觀天儀象)은 오래되면 오차가 나서 해마다 고치는 실정이니, 이와 같은 사람으로 보수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면 반드시 정교하고 치밀하여 쉽게 오차가 생기지 않을 듯싶습니다. 그러나 관상대에는 소속시킬 만한 곳이 없어서 즉시 소속시킬 수 없으니 우선 가습독(假習讀)이란 칭호를 주어 항상 나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간의대 규표 수리2

명종 1(1546 병오 / 명 가정(嘉靖) 25) 919(계유)

以簡儀圭表修理分等單子 下于政院曰 論賞有差 工曹參議金遂性雖死 妻子在焉 依他給馬

간의(簡儀)·규표(圭表)의 수리한 데 대한 분등 단자(分等單子)를 정원에 내리면서 전교하기를, “논상(論賞)에는 차등이 있다. 공조 참의 김수성(金遂性)은 죽었으나 처자가 있으니 다른 사람의 예에 의거하여 말[馬]을 내리라.” 하였다.


■ 간의대의 규표 관측1

명종 2(1547 정미 / 명 가정(嘉靖) 26) 112(기묘)

觀象監啓曰 測候宗廟洞口及惠政橋兩處仰釜日晷 太陽行度 冬至畫竝差違 簡儀臺大圭表彰影七丈三尺六寸 小圭表影一丈四尺五寸六分

관상감이 아뢰었다. “종묘(宗廟) 동구(洞口)와 혜정교(惠政橋) 두 곳의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보니 태양(太陽)의 행도(行度)와 동지 획(冬至畫)이 모두 차이가 있었습니다. 간의대(簡儀臺)의 대규표(大圭表)의 그림자는 길이가 7(丈) 3(尺) 6(寸)이었으며 소규표(小圭表)의 그림자는 1456분이었습니다.”


■ 간의대의 규표 관측2

명종 3(1548 무신 / 명 가정(嘉靖) 27) 114(신묘)

望月影測候 簡儀臺大圭表影長二丈九尺七寸 小圭表影長五尺八寸五分半

보름달 그림자를 살펴서 기후를 관측하였다. 간의대(簡儀臺)의 큰 규표(圭表)그림자는 길이가 2(丈) 9(尺) 7(寸)이고, 작은 규표(圭表)의 그림자는 길이가 585(分) 반이었다.


■ 간의대의 규표 관측3

명종 4(1549 기유 / 명 가정(嘉靖) 28) 1124(기축)

冬至 測候宗廟洞口惠政橋兩處 仰釜日晷太陽行度 冬至畫幷差違 簡儀臺小圭表影 長一丈四尺五寸四分 大圭表影 長七丈三尺四寸一分

동지(冬至)에 종묘(宗廟)의 동구(洞口)와 혜정교(惠政橋)에 있는 앙부일구(仰釜日晷)962) 를 측후(測候)하였는데 태양 행도(行度)가 동지의 획(畫)에 모두 어긋났다. 간의대(簡儀臺)의 소규표(小圭表) 그림자 길이는 1454분이었고, 대규표(大圭表) 그림자 길이는 7341분이었다.


■ 간의대의 규표 관측4

명종 18(1563 계해 / 명 가정(嘉靖) 42) 1127(임인)

簡儀臺測影 大圭表影 長六丈七尺五寸二分 小圭表影 長一丈四尺五寸二分

간의대(簡儀臺)에서 그림자를 관측(觀測)해 보니 대규표(大圭表)의 그림자는 길이가 6752분이었고 소규표의 그림자는 1452분이었다


■ 간의대 관련기사2

명종 8(1553 계축 / 명 가정(嘉靖) 32) 34(경술)

憲府啓曰 近年以來 水旱連仍 飢饉荐臻 加以賦役煩重 民不堪命 流離死亡 村落空虛 當此之時 復値軍籍 係累栲拷問 民生失業 困苦之狀 所不忍言 切迫之災 未有慘於今日 而上下恬嬉 不思備災之策 如造成軍籍都監 簡儀臺及其他權設衙門頗多 軍人之役 供億之費 有難枚擧 請一切停罷 以省浮費 以應天災 答曰 量減浮費可也

헌부가 아뢰기를, “근년 이후로 수한(水旱)이 계속되고 기근이 거푸 이른데다가 부역이 번거로우니 백성들이 관명(官命)을 감당할 수 없어 유리하고 사망하여 촌락이 텅 비었습니다. 이런 때에 다시 군적을 만드느라고 신역(身役)을 피한 자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니, 백성들이 생업을 잃어 곤란한 상태를 차마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절박한 재변이 오늘보다 참혹한 적이 없었는데 상하(上下)가 게을리하고 재변의 대비책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군적 도감(軍籍都監)·간의대(簡儀臺)와 기타 임시로 설치한 많은 아문과 군인의 역사와 지공(支供)하는 비용 등을 일일이 거론하기 어렵습니다. 일체를 정파(停罷)하여 부비(浮費)를 줄여 천변에 대응하소서.” 하니, 부비를 양감(量減)하도록 하라고 답하였다.


■ 간의대 관련기사3

명종 8(1553 계축 / 명 가정(嘉靖) 32) 918(신유)

掌令許曄 性本昏暗 不辨是非 逕情直行 惟意所欲 欲造其家 招黃海道萬戶 平生不知者於其家 責輸材木 其萬戶恐不能辦 訴悶於有一宰相之家 簡儀臺使令 私役于家 爲舍人時 招禮賓寺下人之爲北平館庫直者 使貿毛物 不稱其意 輒爲囚禁 其他徵索列郡 貪黷之事 不可勝言

장령(掌令) 허엽(許曄)은 성품이 본래 어두워 시비를 분변하지 못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제멋대로 행동합니다. 자기 집을 지으려고 평소 알지도 못하던 황해도 만호를 자기 집에 불러다가 재목을 수송해 오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 만호는 변통하여 마련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자신의 답답함을 어떤 재상집에 하소연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간의대 사령(簡儀臺使令)을 뽑아다가 그 집에 사역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사인(舍人)이 되었을 때는 예빈시(禮賓寺)의 하인으로서 북평관(北平館)의 고직(庫直)으로 있는 이를 불러다가 모직물을 무역하게 했는데,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즉시 구금하곤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고을에서 물건을 징수했던 탐역스러운 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 간의대 부제조 박민헌 기사

명종 10(1555 을묘 / 명 가정(嘉靖) 34) 1111(임인)

壬寅/觀象監啓曰 副提調朴民獻 欽敬閣簡儀臺報漏閣及天文地理命課學等 專掌檢擧 詳知首末 今雖爲承旨 不可改差提調 內監亦闕 內衙門請令民獻 間間任進 傳曰 祖宗朝重天文 以文官專意爲之焉 承旨務劇 不可兼任 其遞之\

관상감(觀象監)이 아뢰기를, “부제조(副提調) 박민헌(朴民獻)은 흠경각(欽敬閣)·간의대(簡儀臺)·보루각(報漏閣) 및 천문(天文)·지리(地理)·명과학(命課學) 등을 전담하여 단속하였으므로, 수말(首末)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승지(承旨)가 되었으나 제조를 개차(改差)할 수 없습니다. 내감(內監)도 궐내(闕內)의 아문(衙門)이니 박민헌으로 하여금 틈틈히 사진(仕進)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조종조에서는 천문을 중요하게 여겨 문관(文官)으로 그것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승지는 업무가 바쁘니 겸임할 수 없다. 체임하라.” 하였다.


■ 간의대 수개도감 기사

선조 13(1580 경진 / 명 만력(萬曆) 8) 525(계사)

癸巳有夕講 備忘記簡儀臺修改都監 都提調領議政朴淳提調判中樞府事元混刑曹判書鄭宗榮 常坐提調大司憲李山海副提調副提學鄭琢 各熟馬一匹 郞廳前舍人許篈 半熟馬一匹 監校官承文院副正字尹皞等 各兒馬一匹 其餘監役官及匠人等 皆給賞有差\

석강이 있었다.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간의대 수개 도감 도제조(簡儀臺修改都監都提調) 영의정(領議政) 박순(朴淳), 제조 판중추부사 원혼(元混), 형조 판서 정종영(鄭宗榮), 상좌 제조(常坐提調) 대사헌 이산해(李山海), 부제조 부제학 정탁(鄭琢)에게는 숙마(熟馬) 각각 1필씩, 낭청 전 사인 허봉(許篈)에게는 반숙마(半熟馬) 1, 감교관 승문원 부정자 윤호(尹皞) 등에게는 아마(兒馬) 1필씩 하사하고, 그 외에 감역관 및 장인(匠人) 등에게도 모두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 임진왜란이후 간의대 기사

선조 33(1600 경자 / 명 만력(萬曆) 28) 725(병인)

領議政李恒福左議政李憲國右議政金命元吏曹判書韓應寅知中樞府事尹自新禮曹參判柳永吉兵曹參判韓浚謙左尹成泳 抱川新坪山看審後啓曰 抱川新坪 形勢可用 則術官等論議 初無異同 而所爭未定者 只是壬火子水兩山之別 天地山川 雖有一定之方位 而人之分別 必用鍼石 乃能定位 毫釐有差 方位自別 而經亂以後 術官所持鍼石 率多意造 無詳細校正之石 故臣等慮有未盡之弊 與左尹成泳 適有平時校正於簡儀臺者 分數極精 以此定位 故主山與落穴 俱爲壬火山 於水破爲三文曲 其於國用 無所欠 且正穴 可作雙墳與否 看審事 亦有傳敎 故臣等辭朝時 一面派遣術官於康陵 雙墳石欄干周圍 連繩尺量而來 移準於今此新點六處 則左旁陂陁 必於穴心 亦爲補土 然後乃可成雙墳 或言穴心補土 似難爲用云 古長穴 則於正穴 當爲白虎 不可用之意 前已啓達矣 地勢狹窄 尤不可爲雙墳矣 答曰 南鍼雖有彼此之異 而旣非天神所指敎 尺寸方位 其誰知之 恐茫昧難信也 但此處 旣不能作雙墳 又不可用右穴云 則此山用之爲難 大槪天朝 則壽山預爲營造 我皇上 亦已爲之 今適於此際 欲爲予他日之所 非獨爲大行也 此處如不可用 則雖數日程之外 亦不妨

영의정 이항복, 좌의정 이헌국, 우의정 김명원, 이조 판서 한응인, 지중추부사 윤자신, 예조 참판 유영길, 병조 참판 한준겸, 좌윤(左尹) 성영(成泳)이 포천(抱川) 신평(新坪)의 산지(山地)를 간심한 후 아뢰기를, “포천 신평의 형세가 쓸 만한 것에 대해서는 술관 등의 논의가 처음부터 이견이 없었는데, 쟁론하며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임화(壬火)와 자수(子水) 두 산의 분별에 있었습니다. 천하의 산천은 나름대로 일정한 방위가 있으나, 사람이 분별할 적에는 반드시 침석(鍼石)을 써야 능히 방위를 정할 수 있는데, 털끝만큼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방위가 저절로 달라집니다. 난리를 겪은 후 술관이 소지한 침석이 대개 사조(私造)한 것이 많고 상세히 교정한 침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미진한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좌윤 성영과 함께 마침 평시에 간의대(簡儀臺)에서 교정한 것으로서 분수(分數)가 극히 정밀한 침석이 있어 이것으로 방위를 정하였습니다. 주산(主山)과 낙혈(落穴)이 모두 임화산(壬火山)이 되고 수파(水破)는 삼문곡(三文曲)이 되므로 국용(國用)에 있어 흠이 없었습니다. 또 정혈(正穴)에 쌍분을 만들 수 있을 지의 여부를 간심하는 일로 전교하셨기에, 신들이 사조(辭朝)할 때 일변 술관을 강릉(康陵)에 파견하여 쌍분의 석난간(石欄干) 주위를 측량해 오게 하여 그것을 지금의 새로 지점한 여섯 곳에 대조하여 비교해 보았는데, 좌측이 기울어져서 반드시 혈심(穴心)에 보토(補土)를 한 연후에야 쌍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혈심에 보토를 해야 하므로 쓰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측의 장혈(長穴)은 정혈에서 백호(白虎)가 되므로 쓸 수 없다는 뜻을 전에 이미 계달하였거니와 지세가 협착하여 더욱 쌍분을 만들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남침(南鍼)이 비록 피차 다른 것이 있으나 천신(天神)이 지교(指敎)한 바가 아니니 그 척촌(尺寸)의 방위를 누가 알겠는가. 애매하여 믿기 어려울 듯싶다. 다만 이곳은 쌍분을 만들수 없고 또 우측의 혈을 쓸 수 없다고 하니 이 산은 쓰기가 어렵다. 대개 중국에서는 수산(壽山)을 미리 만드는데 우리 황상께서도 또한 이미 만들어 놓았다. 마침 이 기회에 나의 훗날 처소를 만들고 싶다. 유독 대행을 위할 뿐만이 아니다. 이곳을 만약 쓸 수 없다면 비록 며칠 길 밖이라도 또한 해롭지 않다.” 하였다.


■ 간의도감 기사1

선조 35(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 1112(기사)

諫院啓曰 臣等伏見慶尙監司李時發狀啓 去九月星殞之變 極爲駭異 同月二十二日及四日 亦於京中 連有是變 而人或有見之者 一月之內 疊見至此 而觀象監官員等 不僅謹看候 闕焉不啓 其昏迷天象之罪 極矣 請各日應直官員等 幷命拿鞫 當此國計罄竭之時 權設別局 雖出於不得已 不可不速完其事 以除一分之費 而錄勳都監 翊運功臣等勘定 若待鄭崑壽出仕之後 則崑壽之病 非旬日可差 遲延益甚 簡儀都監 亦因鄭協久病不仕 檢督無人 以下該掌之官 故爲玩愒 完事無期 極爲未便 請錄勳都監 令見在無故勳臣 速爲磨勘 簡儀都監都廳 亦以無故人改差 使之檢督畢役 簡儀都監次知官員 幷命推考治罪 大丘判官李時楨 爲人昏劣 政委下吏 營門重地 日就凋弊 請命罷職 答曰 依啓 錄勳事 令都監更議以啓

간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경상 감사 이시발(李時發)의 장계를 보건대, 지난 9월에 별이 떨어진 이변이 있었다고 하였는 바, 매우 놀랍습니다. 같은 달 22일과 24일에도 서울에 그와 같은 이변이 잇따라 일어나서 본 사람도 있습니다. 한 달 내에 두 번씩이나 이런 변이 일어났는데도 관상감 관원들은 제대로 살피지 아니하여 빠뜨리고 아뢰지 않았으니 천문(天文)에 혼미한 죄가 큽니다. 그날 응직(應直)한 관원들을 모두 나국하소서. 나라의 경비(經費)가 이렇게 궁할 때, 임시로 별국(別局)을 설치하는 것은 부득이해서이지만 그 일을 속히 완성시켜 한 푼의 경비라도 덜어야 합니다. 녹훈 도감(錄勳都監)이 익운 공신(翊運功臣) 등을 감정(勘定)하는 것을 정곤수(鄭崑壽)가 출사할 때까지 기다린다면 곤수의 병이 단시일 내에 차도가 있을 것 같지 않으니 너무 지연됩니다. 간의 도감(簡儀都監)도 정협(鄭協)이 오랜 병으로 출사하지 못하여 검독(檢督)할 사람이 없자 그 밑의 해당(該當) 관리들이 그럭저럭 시간만 보내어 일을 완결시킬 기약이 없으니 매우 미편합니다. 녹훈 도감은 현재 무고(無故)한 훈신으로 하여금 속히 마감하게 하고 간의 도감의 도청(都廳)도 무고한 사람으로 고쳐 차임하여 검독해서 일을 마치게 하고, 간의 도감 차지관원은 모두 추고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 대구 판관 이시정(李時楨)은 사람됨이 혼미하여 정사를 하리(下吏)에게 맡기므로 영문(營門)의 중지(重地)가 날마다 피폐해 갑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녹훈에 관한 일은 도감에게 다시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 간의도감 기사2

선조 36(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 27(갑오)

工曹啓曰 刻漏之設 實關於推測天時 以驗其運行遲速 而造器違法 授時失度 以致晷刻舛訛 長短不齊 違天誤人 誠如聖敎矣 第念設漏之規 創非斯今 王政之大 亦在於此 不可以在察不精之故 幷廢其當設之器物也 而況變亂之後 器物俱失 今之所用 只是行在時行漏 推測無憑 以此啓請鳩材 經營一年 僅得成形 若經霖霾 終歸無用 臣等之意 當國家多事之日 不必高大設閣 似當於前日啓請之地 略造安妥之處 亦或無妨 而但戶曹判書成泳則以爲 自今諸處營繕之役 幷擧疊興 國無材料 措辦無策 今此漏閣排設 又値此時 則以本曹綿力 決無需應之路 姑待後日起役宜當云令 簡儀都監 處置何如 傳曰 允

공조가 아뢰기를, “각루(刻漏)의 설치는 실로 천시(天時)를 추측(推測)하여 그 운행(運行)의 지속을 살피는 데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구를 만듦에 있어 제도에 어긋나고 때[時]를 알림에 있어서 도수가 어긋나 구각(晷刻)이 잘못되고 장단(長短)이 고르지 않으니 천시(天時)를 어기고 인사(人事)를 그릇되게 함이 참으로 상께서 전교하신 바와 같습니다. 생각하건대, 각루를 설치하는 제도는 오늘날에 초창(初創)된 것이 아니며, 왕정(王政)에 있어서 중요한 것도 역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피기에 정밀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당연히 설치해야 하는 기물(器物)까지 폐할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난을 겪은 후에는 기물이 모두 없어져서 지금 쓰고 있는 것은 바로 행재소에서 쓰던 것이어서 추측할 길이 없는 데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재목을 모으도록 계청(啓請)하여 경영한 지 1년 만에 겨우 모양을 이루었는데, 만약 장마철을 겪는다면 끝내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나라에 일이 많은 때를 당하였으니 반드시 높고 크게 누각(漏閣)을 세울 것이 아니라 전일에 계청한 곳에다 간략하게 놓아둘 곳을 만드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다만 호조 판서 성영(成泳)지금 여러 곳에서 영선하는 역사(役事)가 한꺼번에 겹쳐 일어나 나라에 재목이 부족하여 마련할 길이 없다. 이 누각을 짓는 역사를 지금 일으킨다면 본조의 부족한 힘으로는 결단코 마련해 낼 길이 없으니 우선은 뒷날을 기다렸다가 역사를 하는 것이 무방하겠다.’고 합니다. 간의 도감(簡儀都監)으로 하여금 조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간의도감 기사3

선조 36(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 525(경진)

簡儀都監 以役訖聞 傳曰 領事提調前提調都廳前都廳 各熟馬一匹賜給 監造官前監造官 連二等 本衙門准品付祿 匠人等 令戶曹分等論賞

간의 도감(簡儀都監)이 역사가 끝났다고 계문(啓聞)하니, 전교하였다. “영사(領事)·제조·전 제조·도청(都廳)·전 도청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1필씩 내리고, 감조관(監造官)·전 감조관에게는 본 아문의 품계대로 두 분기(分期)의 녹을 주고, 장인(匠人) 등은 호조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 논상하도록 하라.”


■ 간의대 관련기사4

영조 4(1728 무신 / 청 옹정(雍正) 6) 218(기해)

上御晝講 講舜典 至璣衡 趙顯命言 特進官權以鎭 曉解此 上命詳解以奏 以鎭解訓誥以對 金東弼曰 舜察玉衡 以齊七政 我世宗大王設簡儀臺 置欽敬報漏二閣 肅廟朝 設齊政閣 安璣衡 以盡欽崇之道 願殿下 深留聖意於體天行道之事 李宗城曰 但察璣衡 而無一心合天之德 亦無益也 我世宗 東方聖人 禮樂文物大備 有世宗德 然後簡儀欽敬可用也 不然 雖有此物 豈有於乎不忘之德耶 上深然之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순전(舜典)을 강론하였다. 선기옥형(璇璣玉衡)에 이르러 조현명이 말하기를, “특진관(特進官) 권이진(權以鎭)이 이에 대하여 소상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자세하게 해석(解釋)하여 아뢰라고 명하니, 권이진이 훈고(訓誥)를 해석하여 대답하였다.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舜)임금은 옥형(玉衡)을 살펴 천체(天體)의 운행(運行)을 가지런하게 했으며,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는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하고 흠경각(欽敬閣)과 보루각(報漏閣)을 세웠으며, 숙묘조(肅廟朝)에서는 제정각(齊政閣)을 설치하고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안치(安置)하여 공경하는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을 본받아 도(道)를 행하는 일에 깊이 유의(留意)하소서.” 하고, 이종성은 말하기를, “다만 선기옥형만 살피고 한 마음이 하늘의 덕(德)과 합하지 않는다면 또한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우리 세종 대왕께서는 동방의 성인(聖人)으로서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크게 갖추어졌으니, 세종 대왕의 덕화(德化)가 있은 후에 간의대와 흠경각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록 이 물건이 있더라도 어찌 백성들이 찬탄(讚歎)하여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은덕(恩德)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매우 옳게 여겼다.